top of page
  • 김진우 목사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말의 싸움?



사무엘상 17장은 그 유명한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으로 우리가 잘 아는 내용이다. 17장 초반부터 벌써 성경은 우리로 주눅들게 할 만한 내용들로 채워 넣는다. 골리앗의 대한 묘사가 매우 자세히 나오고 있다. 우리가 수많은 믿음의 영웅들을 성경에서 보아왔어도, 성경은 한번도, 그들의 외모나 풍채에 대한 우리의 궁금중을 해소해 주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 이 골리앗에 대한 묘사, 그가 키가 얼마인지, 그가 입은 갑옷의 무게가 얼마인지, 그가 어떤 무기들을 가지고 나왔는지, 왜 그렇게 "성실히" 묘사하고 있는가?


얼핏보면, 청동으로 둘러싸인 이 거대한 골리앗은 하나의 거대한 우상처럼 보인다. 이 거대한 우상이 태양빛을 받으며 번쩍이고 있다고 생각해 보라. 두 항오 하는 이스라엘과 블레셋 진영 중앙에 서서 표효를 내는 것이다. 대단한 광경이었으리라.


하지만 성경은 매우 특이하다. 오늘 이스라엘 사람들의 리액션을 묘사하고 있는 것을 보라.

 

(삼상 17:11) 사울과 온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의 이 말을 듣고 놀라 크게 두려워하니라

 

 성경은 이스라엘과 사울왕이 그의 풍채와 그의 군사 장비에 놀라 크게 두려워 했다라고 하지 않는다. 성경은 단호하게, 온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의 말을 듣고 크게 놀라 두려워했다라고 하고 있다.


왜, 이스라엘은 그의 말에 두려움에 떨었을까? 바로 이것이 말의 권세라는 것이다. 말의 능력이라는 것이다. 그럼, 이 골리앗은 어떻게 하여, 말의 권세가 있었는가, 그냥 말의 권위, 권세가 붙을 리는 없다. 그의 말에 권세가 있는 것은, 그의 경력일 수 있다. 그의 경험일 수 있다. 수많은 전쟁에서, 싸움에서 승리한 내로라하는 그의 화려한 경력이 그의 말을 뒷받침 하니까, 그의 말에 힘이 붙는다.

또한 그의 풍채, 외모일 수 있다. 키가 3m 까지도 될 수 있는 그의 말을 누가 무시할 수 있으랴. 그의 외모와 풍채가 그의 말의 힘을 실어 주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가 전쟁에 들고 온 전쟁 장비들이다. 어떤 장비들인지도 현대 사람은 쉽게 알 수 없는 대단한 무기들로 온몸을 도배하고 나온 자이다. 모든 공격용 무기를 자기 갑옷에 갖추고 나왔고, 방어용 무기는 들 수 없으니, 사람을 부리면서 나오는 것이다. 그가 전쟁을 위해 갖추고 나온 장비, 물건들이 그의 말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누가 이 거대한 자, 모든 것을 갖춘자, 화려한 전적을 가지고 있는 자의 말을 무시할 수 있는 가? 그의 말에는 권세가 있다. 세상의 능력이 있다. 일대일로 서게 되는 모든 이가 무릎 꾾을 것이다. 사단의 조커로, 사단의 히든 카드로 골리앗을 보내는 것이다. 이스라엘을 무릎꾾게 할 최고의 카드이다.


 

그런데, 오늘, 양치기 소년이 등장한다. 전쟁의 무기가 아니라, 빵과 치즈를 싸서 전쟁터로 향한다. 방패 잡이가 아니라, 짐꾼을 앞세우고 전쟁터로 나간다. 전쟁터에 전쟁을 하러 간것도 아니다. 심부름 하러 간다. 이 소년이 하나님의 히든 카드이다. 그는 전쟁을 본적도, 참가해 본적도 없다. 그는 자신의 칼도 가져본 적이 없고 자신의 갑옷도 입어본 적이 없다. 하나님은 이 소년을 앞세우고 오늘 전쟁에 나가신다. 사단의 히든 카드와 여호와의 히든 카드가 이렇게 대조적으로 보이다니.


마침 다윗이 빵을 건네주러 갔을 때 골리앗이 나와 다시 한번 싸움을 돋군다.

"나와서 싸우자, 너희중에 제일 난 놈이 나와서 싸우자. 다 싸울것 없고, 최고의 용사들이 겨뤄서, 피해를 줄이고, 이기는 자에게 종이되자! " 설득력 있게 들리는 제안이다. 하지만 문제는 나갈 사람이 없다.


다윗이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나가서 싸워서 이기는 자에게 사울이 이렇게 이렇게 포상을 한다고 하네... 다윗은 다시 한번 그들에게 가서 묻는데, 첫째 형 엘리압을 그것을 보고 노발 대발한다. 성경은 굳이 엘리압의 대사를 기록한다. 왜 그런지 이제 알 수 있다. 사무엘이 엘리압을 기름 부을려고 했지만, 하나님께서 막으셨다. 하셨던 말씀이 나는 사람의 중심을 본다 였다. 오늘, 엘리압이 다윗에게 하는 말을 들어보자. 어떤 말인가?


 

(삼상 17:28)  장형 엘리압이 다윗이 사람들에게 하는 말을 들은지라 그가 다윗에게 노를 발하여 가로되 네가 어찌하여 이리로 내려왔느냐 들에 있는 몇 양을 뉘게 맡겼느냐 나는 네 교만과 네 마음의 완악함을 아노니 네가 전쟁을 구경하러 왔도다 

 

요점인즉, 엘리압이 말하길, 나는 네 중심을 뻔히 바라 본다- 이다. 그리고 네 중심에 교만과 악독이 숨어있음을 내가 본다- 이다. 그런데 이게 가능한가? 자기가 신통한 선지자인가? 하물며 사무엘도, 알지 못하는 사람의 중심을, 엘리압 자기가 무슨 신통 방통한 능력으로 알 수 있다라는 말인가? 논리의 추론인가? 하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귀뜸한다. 이것이 엘리압의 중심이라고. 엘리압을 하나님이 버리신 이유는 바로, 그의 중심이 이것이다. 그는 결백하고 순수한 다윗의 말과 행동을 자신의 중심으로 투영하여 정죄한다. 교만과 악독에 쩔어있는 것은 사실 엘리압 자신이었다. 그가 다윗을 무시함을 여러군데 에서 주목할 수 있다. 아버지의 양떼를 맡고 있는 그를 보고, "누구에게 그 딴 몇 안되는 양을 맡기고 왔는냐" (이렇게 해석할 수 있다. ) 하고 말하고 있다.

사무엘이 첫째인 자신을 제치고, 막내인 다윗을 선택할 때부터, 다윗에 대한 좋지 못한 감정이 날마다 쌓여가고 있었으리라. 끝내 그는 아무것도 잘못한 것 없고 오히려 자신에게 선의를 베풀러 온자를 멸시하고 정죄하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놀라운 것은, 다윗은 엘리압의 정죄와 판단의 말에 주눅들지 않는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삼상 17:29_  다윗이 가로되 내가 무엇을 하였나이까 어찌 이유가 없으리이까 하고 

 

사실 원어로 봐야 말의 중요성이 무엇인지 실감하게 된다. "다윗이 가로되 나의 말한마디 아닙니까?" 그렇다. 다윗은 말 한마디 한 거 밖에 없다. 하지만, 그 말한마디가 얼마나 중요한지 보게 된다. 왜냐면 그 한마디는 지금 절망속에 있는 이스라엘 모두와 그들의 왕 다윗이 없는 말이다. 그들의 말과 색깔이 틀린 말이다. 그 말에는 가능성이 있다. 지금 다윗이 하는 말은 희망의 말이다. 그 희망의 톤을 감지한 자들이 하는 행동을 보라.


 

(삼상 17:31)  혹이 다윗의 한 말을 듣고 그것을 사울에게 고하였으므로 사울이 다윗을 부른지라 

 

그렇다. 다윗의 한 말에 뭐가 들어있는지 감지하는 사람이 있었다. 내가 이사람을 쳐서 하나님의 군대 이스라엘에게 씌여진 수치를 잘라내리라. 이 할례받지 못한 자를 내가 없이 하리라. 꼭, 블레셋이 이스라엘에게 임한 수치임을 나타내는 것 같은 문장이다. 할례라는 개념으로 이해할 수도 있는 답변이다. 할례는 하나님의 언약아래 있는 이스라엘 남성이 수치의 육신의 살을 끊어내는 행위이다. 오늘 다윗은 이 일을 하러 간다-- 신앙으로 말 하고 있다. 신앙의 말이 가능성이 되고 있다. 그러니까.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누군가 그 말을 가지고 사울에게로 갔던 것이다. 그리고 사울이 다윗을 부른 것이다. 다윗이 사울을 찾아 간 것이 아니라. 말이 사울을 찾아가, 사울이 말로 그를 부르러 사람을 보낸 것이다. 사울이 왜 다윗을 불렀을까? 그도 다윗에게 약간의 희망을 보았던 것일까? 다윗에게 무언가 해답이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사울은 이미 다윗을 알고 있다. 그의 유능함을 그의 지혜를 그의 영성을 알고 있다. 혹시나 해서 다윗이라는 젊은 이에게라도 답이 있을 수 있을까, 조그만 희망을 건 것일 수 있다.


하지만 그의 다음 대사에는 양면성이 보인다. 나간다고 하는 다윗에게 이렇게 이야기 한다.


 

(삼상 17:33)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기에 능치 못하리니 너는 소년이요 그는 어려서부터 용사임이니라

 

불러 와놓고는 "너는 불가능해! 라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도 다윗의 외모에 희망을 잃어버린 것인가? 사울은 다윗의 외모에 희망을 잃지만, 그래서 다윗에게 너는 불가능하다라고 말하지만, 여기서도 다윗은 진가를 발휘한다. 엘리압이 너는 고약한 인간이야, 인신 공격을 했지만,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이제는 사울 왕이 너는 능력이 안돼, 상당히 공신력있는 객관적인 비평을 하고 있지만, 거기서도 물러나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말"로써, 사울을 설득하는 힘을 발휘한다. 왜냐, 다윗의 말에도, 골리앗 못지 않는 권세가 있다. 사울과 그의 신하들은 잘 알지 못하고 있었겠지만, 그들이 다윗의 말의 권세에 지금 설득당하고 있다.


다윗이 어떤 말을 하는냐, 그도 용사라는 것이다. 그들이 생각하는 일반적인 용사가 아니나, 그도 들판에서 양들을 지키며 사자와 곰과 싸우며 진가를 발휘했던 용사라는 것이다. 거기다, 그의 뒤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믿음의 권세의 증언이 뒷받침하고 있었던 것이다.

 

(삼상 17:37)  또 가로되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 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

 

절망이 있는 곳에서 다윗은 희망을 뿜어내고 있다. 그의 용모와 경력과 무기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그의 내면에서 자연스럽게 넘쳐 흘러 나오고 있는 여호와에 대한 신뢰에 기반한 자신감이다. 그의 중심을 보신 여호와가 왜 다윗을 선택했는 지 이제 우린 서서히 알게 된다. 그는 하나님과 살아온 삶의 흔적이 있는 자이다. 그러면서 그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을 마음속으로 깊이 체험하고, 그것이 그의 중심에 자리잡힌 자이다. 그는 자신의 힘으로 사자와 곰을 죽였다고 보지 않는다. 그는 그가 한마리의 양도 뺏기지 않으려고 목숨을 다한 사투를 할 때, 하나님을 의지하고, 나아갔고 그리고 승리했고, 이제 지금도 그와 다를게 없다라고 하고 있다. 철저히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신앙의 자세에서,, 그의 말에 권세가 나오고 있다. 가능성이 나오고 있다. 이 말이 누군가에 희망이 되고 있고, 이 말이 행동으로 옮겨지고 있고, 이 말이 이제는 골리앗과의 전투에서 골리앗의 권세를 꺽으며, 수치에 노출 되었던 이스라엘에게 수치를 끊어버리게 하는 위대한 승리의 무기가 되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나를 건져 내셨은즉!"

얼마나 많은 환란과 곤란에서 주가 나를 건지셨는가? 만약, 조그만 구원에서부터 큰 구원의 함께 하신 여호와를 내가 기억했고, 찬양했고 감사하고 있었더라면, 내 중심이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희망과 능력의 권세가 뿜어 나오고 있지 않았을까?


오늘, 우리는 다시 나의 들판에서 훗날 싸움의 승리를 다져야 된다!


조회수 4,036회댓글 0개

최근 게시물

전체 보기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