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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진우 목사

2020년 이후 미래의 교회는 (2) - 가상 실시간 예배? -- 코로나는 교회의 기회?



"흥"이 빠져도 예배에 "흥?" 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앞서 다루었다.


외부 요소에 의해서 흥이 더해질 수도 빠질 수도 있다. 좋은 환경이 흥을 더할 수도, 나쁜 환경이 흥을 더할 수도 뺄 수도 있다.


온라인은 가상 환경과 가깝다. 물론 일어나는 일이지만, 여기서 내가 있는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디지털화 된 현실이 내게 보여지는 것이다. 멀리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을 보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은혜를 받을 수도 있고 누릴 수도 있다라고 보고 있다.



만약, 가상의 예배의 공간을 만들고 거기 들어가서 예배를 드린다고 해 보자. 목회자의 준비된 스크립을 설교자처럼 능숙하게 읽어 줄 수 있는 AI 가 있고, 아주 핸섬하게 생긴 목사가 이미지 합성기술인 Deepfake를 통해 강단에서 시간에 맞추어 나온다. 가상의 성가대가 준비되어 있고 내가 좋아하는 찬양 위주로 선곡을 하여 불러 준다. 교회 인테리어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세팅으로 고를 수 있고, 매주 다른 세팅으로 조절할 수도 있다. 매주 다른 목사, 다른 세팅, 다른 환경에서 지루하지 않는 예배의 방식과 형식으로 나의 예배에 '흥'을 돋구어 줄 수 있다..


그리고 나는 거기에서 감동받고 하나님을 찬양한다. 감사한다. 성경에 대한 교훈을 받는다.


이 모든 것이 현실성 없게 보이지만 그렇지만도 않다. 언젠가는 우리 모든 영역에서 일어날 일이고, 예배도 예외가 아닐 수 있다. 과연 갈 수록 높아지는 대지와, 임대료, 관리비, 인건비를 감당할 수 있을까? 더 가성비가 좋은 흥의 도구들과 환경이 가상 현실을 통해 우리의 삶에 접목될 수 있다면, 그곳에 가서 내가 '안전하게' 예배의 만족감을 느낄 수 있다면 이것을 모두가 배척하리라는 법은 없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지금 우리의 입장에서 보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이것을 어떻게 보실까?


좀 더 좋은 시설과 음악과 더 좋은 목사를 예배에 동원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더 낳은 예배라고 할 것인가?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가 꼭 흥이 나는 환경에서 흥겹게 예배드리는 예배는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꼭 흥이 없는 환경에서 흥 없이 드리는 예배도 아닐 것이다.


감히 추측하건대, 하나님은 "진실함이 들어간 흥" 을 원하실 것이다. Spirit and Truth 곧 신령과 진정에서 "진정' 이라는 'truth' 부분이 '흥' spirit 과 같이 갈 때, 성령 the Spirit 이 역사하시는 것이라 생각한다.

감히 추측하건대, 하나님은 "진실함이 들어간 흥" 을 원하실 것이다. Spirit and Truth 곧 신령과 진정에서 "진정' 이라는 'truth' 부분이 '흥' spirit 과 같이 갈 때, 성령 the Spirit 이 역사하시는 것이라 생각한다.

가상 현실에서 진정성이 아예 배제된 것은 아닐 것이다. 성경말씀도 진짜로 있고, 노래도 진짜로 있고, 사람들도 가상현실에서 '진짜로' 모여 있다. 다만, 그것들을 '흥'이 나게 전달하는 매체가 사실 어떤 ' 프로그램머; 곧 '개발자'의 수치적으로 만든 함수값이다.


그 개발자는 현장에 있지 않다, 그 개발자는 이미 떠나있다. 예배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세팅을 완성시킨 개발자는 그 예배가 일어나는 곳에 동참하고 있지도 예배의 구성원도 아니다.


여기서 차이가 있다라고 본다. 예배를 만드는 자와 예배를 드리는 자의 차이 또는 괴리가 있는 것이다. 예배를 만드는 자-만들었던 자가 예배자가 아닌 이상한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예배를 만드는 자 VS 예배 드리는 자

이것은 다시 반대로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지게 된다. 예배를 만드는 자와, 예배를 드리는 자의 분리적 요소가 '가상 예배'를 만든다는 점이다. 진정성이 결핍된 예배는 바로, 예배를 만드는 자들이 예배를 드리는 자들과 함께 있지 않음이다. 또한 예배를 드리는 자들이 예배를 만드는 역할을 하지 않는 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이것은 먼 훗날의 문제가 아니라, 다시 지금의 문제로 돌아온다.


예배를 드리는 것과 예배를 만드는 것의 일치가 무엇을 의미하는 가? 나의 존재가 예배의 의식가운데, 하나님께 어떤 영향을 끼쳐야 하며, 그 의식 자체에도 영향을 끼쳐야 된다.


나 혼자서 드리는 예배라 할 지라도 의식은 있다. 더 복잡하고 더 정교한 의식이 있을 수 있고, 아주 간단한 의식이 들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곳에는 예배를 드리는 자와 만드는 자의 일치가 일어난다. 그 의식이 합당하냐 안하냐를 떠나서 예배자가 예배를 드리고, 예배를 만든다는 점에서 '가상예배'와는 차이가 있다.


공동체에서 일어나는 예배를 따지자면 마찬가지 예배를 드리는 자들이 한 곳에서 모여 있음에 서로의 존재감이 남에게 미치는 영향이 있다. 그의 목소리와, 체온과, 함께함이 예배의 의식과 분위기와 세팅에 영향을 끼친다. 그가 비록 예배를 만드는 데 많은 부분을 애쓴 사람은 아닐지라도, 그의 예배를 드리는 자로써의 또 예배를 만들어 가는 자로써의 일치감이, '가상예배'라는 명목은 피할 수 있게 해준다.


코로나가 우리교회에 미친 영향은 우리를 더 가상예배로 몰아 내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거꾸러 생각해 보면, 우린 이미 가상예배의 포맷에 익숙해 진 자들이었다. 우리는 예배 프로그램머들에게 우리의 예배를 맡기었다. 전문가들이 그들의 전문성을 가지고 예배를 '프로그램화' 시키면, 나는 그 속으로 들어가 예배를 즐기는 것이 예배의 대체적인 소비형태였다.

내가 예배를 만들어가는 구성원에 가깝기 보다, 아무 존재감 없는 미디어 소비자에 더 가깝게, 예배의 현장에서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내가 현장에서의 예배를 그리워하고 사모하는 이유가 그 자리가 주는 흥과 생동감, 나의 존재감이라면, 그것이 나쁜 것은 아니라 할 수 있으나, 우리가 그리워 해야 하는 가장 참 이유는 내가 그 예배를 만들어가는 역활에 대한 그리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프로그램머들이 없는 교회에서 내가 애초에 예배의 설계자가 될 마음이 있는가? 나 혼자서 예배를 드려 본 사람이라면, 이 과정을 쉽게 연상할 수 있을 것이다. 나 혼자서도 제대로 된 예배를 드린 다는 것이 무엇인지 고려해 보고 시도해 본 사람이라면, 예배의 설계자가 된다는 의미와 참가자가 된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성도는 이런 도전과 시도에 부딪쳐 본적이 없다. 하지만, 코로나는 적어도 이런 시도를 생각해 보고 시도케 하는 기회가 되게 하였다. 예배의 수동성에서 적극성으로의 발상의 전환을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온라인 예배를 참지 못하고, 다시 원래의 오프라인 예배를 그리워 하는 성도들이 스스로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왜 난 온라인 예배가 예배같지 않다고 생각하는지, 왜 오프라인 예배가 예배라고 생각하는 지.


그리고, 어차피 내가 두 곳에서 모두 가상예배를 드리는 것이었다면, 오프라인 예배로 돌아간다해도, '진정한' 예배와는 거리가 멀다. 내가 원하는 '흥'을 다시 찾는 다 해도, '흥'은 예배의 진정한 요소가 아니였다.

내가 예배를 만들어 가는 역활과 아무 상관이 없을 때, 우리는 어차피 가상예배에서 만족해 하고 있는 빈 포만감 같은 것으로 영적배를 채우고 있었을 뿐이다.

이것은 큰교회이든 작은 교회이든 마찬가지이다. 다만 큰 교회는 더 많은 사람이 가상예배의 현장에 가까울 위험이 더 많다. 작은 교회도 그런 위험이 없지 않다.


그럼, 우리는 이 코로나의 위기를 거쳐 다시 어떤한 예배를 가진 교회로 탈바꿈해야 하는가? 우리 예배의 변화를 근본적으로 요구하는 위기가 이 코로나가 되었다.


----- 다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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