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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우 목사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춤을 출 수 있을까?


예배다운 예배가 무얼까, 이것을 끊임없이 고민해야 하는 자가 목회자이다. 어떤 교회는 많은 자원과 인력이 있다. 어떤 교회는 변변한 악기 하나 없고 노래에 은사가 있는 교인 하나 없을 수 있다. 그렇지만, 자원과 인력이 풍부하다고 해서 예배다운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도 아니요, 변변치 않는 개척교회라고 해서 예배다운 예배가 불가능하다고 할 수도 없다. 그럼, 도대체 어떤 요소가 예배다운 예배와 예배답지 못한 예배를 구분하는 것일까? 이것을 알고 이것에 대처할 수 있는 역량이 예배를 계획하고 주도하는 자에게 당연히 필요한 것이다.

먼저 개인적 예배와 대중적 예배가 있을 것이다. 여기서는 대중적 예배를 다룬다.

먼저 예배의 요소에 들어가야 될 것을 나열해 보자. 예배라는 것은 창조주되신 하나님, 왕되신 하나님, 구속자되신 하나님을 경배하고 그분을 높이는 행위이다. 그렇담 그분을 높이기 위해 우리가 행할 수 있는 행위들을 나열해 보자.

먼저 그분의 하신일에 대한 공표가 있어야 한다. 이것은 그의 하신일을 인정하고 경외롭게 여기며 이것에 대해 감사하는 행위이다.

두번째, 이런 하나님에 대한 감사함의 표현을 우리는 두려움에서 보다는 기쁨과 찬양으로 올려 드려야 한다.

세번째, 우리가 드리는 제물이 있어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온전히 드리는 것으로써 태워 없애는 행위이다. 곧 완전히 드리는 행위이다.

네번째, 이 모든 것이 질서 정연한 가운데에서 집행되어야 한다.

다섯번째, 다양함속에서 조화를 이루어 예배하여야 한다.

여섯번째,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예배 집행자는 예배의 동참자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선포함이 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나를 깨어서 그분을 높임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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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다윗을 보자, 다윗이 하나님의 언약궤를 성으로 가져 오기 위해 가장 먼저 한일이 무엇인가? 다윗은 하나님을 제대로 예배하고 싶었던 사람이다. 자신의 가장 가까운 곳에 하나님의 임재를 거할수 있게, 그래서 예배할 수 있기를 원했던 사람이다. 그렇기에 이 언약궤를 가져오려고 노력한다. 이 언약궤를 가져오는 그 대 과정을 자세히 보면 그것 자체가 예배이다. 먼저 실패했던 첫 예배를 보자.

하나님의 궤를 제사장이 메지 않았기에. 다윗이 과연 레위인이 궤를 메어야 된다는 것을 몰랐을까? 그건 아니다. 하지만 레위인을 모으고 그들을 정렬하고 그들을 준비시키기까지 많은 자원과 시간 동의, 한마디로 너무 큰 비용이 들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시간일 것이다. 다윗은 하루 속히 그 언약궤를 자신의 성으로 들이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열성이 순리 거스름을 정당화 할 수는 없다. 하나님의 언약궤가 레위인이 아니라 소에 의해 끌려온다. 아마도 소에 의해 한번 이동되어있던 적이 있던 터라 스스로 정당화 했을 수 있다. 뭐 그떄도 이렇게 했는데 하면서,,

하지만, 언약궤가 하나님의 자리라는 것을 인정하고 믿었던 다윗이 어떻게 그런 타협을 했을 수 있는가? 이게 사람의 간악함이다. 그곳이 하나님이 앉는 곳이라고 100% 믿는 다면서 어떻게 동물위에서 그것을 운반한다는 것인가? 그것은 짐짝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려와 앉는 곳이다. 하나님이 지금 그곳에 앉아 있다라고 생각하고 대하여야 되는 성물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예배의 실패를 여기서 찾는다. 우리의 모임가운데, 두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곳에 내가 거할 것이다 하셨다. 예수님이 이곳에 100% 오셔서 함께 한다라고 믿는다면서 내가 예를 갖추지 않고 주님의 임재를 함부러 하는 것이 무엇인가?

내가 주님의 임재를 값어치 없게 여기는 곳이 어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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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하여 레위 사람들이 몸을 성결케 하고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명한대로" 채로 하나님의 궤를 꿰어 어깨에 메니라. / 다윗이 노래하는 자를 세우고 여러 악기를 울려 즐거운 소리를 크게 내라 하니 /하나님이 언약궤를 멘 레위사람을 도우셨으므로.... 무리가 수송아지 일곱과 수양 일곱으로 제사를 드렸더라. / 이스라엘 무리는 크게 부르며... / 다윗은 레위 사람과 노래하는 자와 같이 세마포 겉옷을 입었으며/ 다윗은 온 힘으로 춤을 추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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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된 자가 준비된 모습으로 하나님의 궤를 어꺠에 메다: 어깨에 멘다는 의미는 내가 예배하는 것을 누군가를 통해 할 수 없다라는 것이다. 예배는 나와 하나님의 직통의 문제이다. 예배라는 것을 요행으로 할 수 없다. 예배에는 편리주의가 들어올 수 없다.

다윗이 노래하는 자를 세우고 악기를 동원하여 소리를 크게 내니: 예배는 잔잔한 가운데서도, 소리가 큰 가운데서도 할 수 있다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을 찬양하는 대중적 예배에서 찬양을 이끄는 팀은 최대한 많은 소리와 다양한 소리를 내야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소리가 하나로 모아짐이 되어야 한다.

무리가 수송아지 일곱과 수양 일곱으로 제사를 드리다: 제사는 희생을 의미한다. 죄사함을 의미한다. 하나님께 용서함을 구하는 행위이다. 우리의 예배에 반드시 용서함을 구함이 있어야 하고 죄씻음이 있어야 한다. 또한 감사의 제물로 드리는 희생제는 나의 제물을 드리는 것이다.

이스라엘 무리는 크게 부르며: 다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큰 목소리를 낸다.소리가 없이는 예배가 예배답지 못하게 된다.

다윗은 레위사람과 노래하는 모든자와 같이 세마포 겉옷을 입었으며: 다윗은 자신을 예배자로 드렸지, 자신의 높은 신분, 왕으로 가지 않았다. 다윗은 자신의 자주색 왕의 의복을 입고 예배에 동참하는 것이 아니라, 예배 집행자, 찬양자들 중의 하나같이 하얀 세마포를 입고 그들과 같이 되어 그들 속에서 지금 춤을 추고 노래하는 것이다. 세마포 에포드는 하나님의 전을 섬기는 사람이 입는 가장 간단하고 겸손한 의복이었다.

다윗은 온 힘으로 춤을 추었다: 당시 춤은 여성들에게 속한 것이었다. 하지만 다윗은 자신의 왕의 신분을 잠시 잊고 완전히 하나님을 찬양함에 빠져 문화와 신분의 턱을 넘어 혼을 다해 발을 뛰고 손을 드는 것이다. 다윗이 벌거 벗었다는 것은, 그의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모든 사람이 보이든지 말든지 훤히 드러났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벌거벗은 것처럼 드러난다. 하지만 다윗의 마음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감사와 기쁨으로 가득차 있었으니 무엇이 부끄러우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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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온전히 표현될 수 있도록 어떻게 예배를 주관할 수 있을까? 우리 성도들은 모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마음 감사의 마음이 분명 있다. 하지만 이것을 어떻게 마음껏 표현할 수 있게 도와 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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