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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진우 목사

젊은 세대들이 교회에서 사라지는 이유 1


차세대 사역을 하는 우리 목회자들의 고민거리중 하나는 문제의 원인을 정확히 진단하는 것이다. 과연 현교회들에게서 청년 학생들의 출혈은 막을 수 없듯이 계속 되야만 하는가? 어찌하여 한국교회에서는 젋은 세대들의 absence가 가속화 되어 이 지경까지 이르렀는가? 유럽에서 150년에 걸쳐 일어났던 현상이라면, 한국교회에서는 단 30년안에 일어난 일이다라고 할 수 있다.

문제를 알아야 해결책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현상은 이제 분명하다. 현상 내면에 숨어있는 본질적 문제들이 무엇인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이것이 전반 사회에 걸친 구조적 변화에 따른 피할 수 없는 결과물인것인가? 급속한 현대화 곧, 개인주의, 물질주의, 과학주의등의 현대 시대에 나타난 문화, 사회, 경제 변화의 동시다발적인 직격탄들의 연속적 타격의 비참한 결과인 것인가?

물론 적지 않은 외부적 요소가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정직해 질 필요가 있다. 지금 시대는 정보 공유화의 시대, 모든 가격표와 세부사항이 드러나 있는 시대이다. 우리 기독교는 그 동안 보호되어 왔다. 정확한 평가와, 비판을 받을 이유가 없었던 보호시대에 살고 있었다는 것이다. 교리가 좀 이상해도, 목회자의 자질이 불충분해도, 교회 운영이 불투명하다 할지라도, 보호받아 왔었고,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 주는 세대에 살았었다.

하지만, 그런 단계는 이미 전에 넘어갔어야 했었다. 우리가 스스로 판을 보고 미리 수정해 나가고 미리 자성하고 이 시대를 맞이해야 했었다. 타성에 젖어 편의만 받기에 급급하고 거기서 사리를 챙기는 데 까지, 교회는 오히려 스스로를 깨지 못하고, 더 깊이 어두운 곳으로 움크러 들었다.

이제 사회는 눈을 뜨게 되었다. 우리의 행동, 우리의 교리, 우리의 자질 모든 것이 실험대 위에 놓여져 있다. 언제까지 과거의 시스템, 과거의 행동양식으로 같은 결과를 기대하는 과오를 되풀이 하겠는가? 세상의 변화가 문제가 아니였던 것이다. 우리의 잘못된 그릇이 바뀌지 않고, 계속 무게에 짓눌려 한둘 금이 갔던 것이, 이제는 구멍이 되고, 구멍이 커지며, 출혈이 시작된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인성에 구멍이 난 우리 신자들에게도 복음이 들어왔고 그 신자들을 통해서 기독교가 퍼져나갔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두 세대를 건너서 복음을 이해하는 충분한 시간에도 불구 그릇을 바꾸지 않았다는 것은 결국 죄악을 더 사랑하는 우리의 불순종 이다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 결과를 지금 보는 것이다. 사라지는 세대... 열매없는 나무...

젋은 세대가 교회에 가고 싶지 않은 이유는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도 교회에 나타나지 않는데, 굳이 그들도 교회에 갈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교회에 하나님의 임재가 없다는 것이다. 좋은 프로그램, 심취할 수 있는 음악, 재미있는 교제,, 하지만, 그것이 정통으로 사라지는 세대에게 어필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문제는 교회에 하나님이 임재가 없다라는 것이다. 불신자들도, 믿음이 뭔지 잘 모르는 새회원들도,, 어렴풋이 이곳은 거룩한 존재의 부재가 있다라는 것을 깨닫는 다는 것이다. 그래서 천주교 같은 종교적 의식의 색채가 오히려 짙은 곳을 선호하는 역현상도 생기는 것이다. 우리는 새 새대에 맞추는라, 꽹과리, 북, 장구 다 들여왔어도,,, 그것이 그들의 비위를 맞출 수 없다는 것이다. 차라리 거룩해 보이는, 하나님의 임재가 있어보이는 곳을 찾기 원한다는 것이다.

그럼 과연 목회자들은 어떻게 하여야, 우리의 예배에, 우리의 교제에, 하나님의 임재가 있도록 할 수 있으며, 하나님과의 경험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장려할 수 있겠는가 이다. 문제의 본질은 이것이다. 왜 하나님을 교회에서 느낄 수 없냐 이것이다.

하나님을 교회의 예배나 의식속에서 느낄 수 있다라고 하는 것은 또 다른 실수의 연속이다. 그 어느 말씀구절에서도, 그리스도의 임재를 우리의 예배나 의식속에서 찾으라고 하지 않으셨다. 그리스도는 곧 하나님의 성육신이다. 하나님이 사람으로 임재했다는 것이다. 사람으로 임재했기에, 우리가 보고, 그를 만지고, 경험했다는 것이다. 똑같은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는 보고, 만지며 경험되어진다는 것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하나님의 임재는 사람을 통해서 경험되어지고 경험되어져야 한다. 이것이 바울사도가 우리에게 계속 가르쳐 준 바이다. 그렇다면, 교회를 방문하는 젋은 층의 불신자들에게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시켜주는 것이 최대의 관문이라면, 우리가 예배를 '큐레이트'하는 패러다임이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게 해 줄려면, 그들이 나를 경험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 그들이 "우리"를 경험할 수 있게 해 줘야 한다.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보여 줘야 하고, 우리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보여주는데에 모든 예배의 형식과 프로그램을 맞춰야 한다는 것이다. 그 전에 앞서, 물론 반드시 필요한 전제는 내 안에, 우리안에 과연 그리스도가 계시냐 이다.

그럼으로 가장 기본은 이것이 될 것이다. 내 안에 충만한 그리스도의 모습이 있느냐, 만약 없으면, 무엇을 하여서 이것을 고치느냐 이다. 이것이 없다면, 내가 아무리 교회 시스템을 바꾸고 프로그램을 도입하고 돈을 갖다 붓는다 해도, 다 부질없다는 것이다.

두번째, 내 안에 그리고 더 강력하게는 우리안에 충만한 그리스도의 모습이 있다면, (할렐루야!) 어떻게 교회의 예배와 교제와 운영과 모든 부분에서,, 이것이 드러날 수 있도록 계획하고 수정 보안 하느냐 이다.

이 두개의 난제가 단계로 극복되어 질때, 교회안에 하나님이 없어서 가기 싫다라는 말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교회안에 있는 하나님이 나랑 맞지 않아서라는 말은 나올지언정, 교회안에 하나님이 없어서라는 치욕적인 말은 듣지 말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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