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진우 목사

불로써 절여지는 크리스챤, 소금으로 절여지는 크리스챤, 구더기와 영원한 불로 절여지는 크리스챤? (2021. 1. 17)

<2021. 1.17 마가복음 9 장 - 절여져야 되는 그리스도인. 변화산상의 그리스도인. >



막 9:47 만일 네 눈이 너를 실족하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 속에 던져지는 것보다 네게 더 나으니 9:48 거기서는 그들의 벌레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9:49 이는 사람마다 불로 절여질 것이요, 희생물마다 소금으로 절여질 것이기 때문이라. 9:50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제 짠맛을 잃으면 너희가 무엇으로 그것의 맛을 내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할렐루야 성도님들, 참으로 반갑습니다. 한주 삶 어떠셨는지요? 한주간 많은 일들이 세상에 있었습니다. 우리 삶에도 여러 일들이 있었지만, 들리는 소식, 뉴스를 보면, 한주 우울해지는 게 참으로 많았습니다. 여전히 들려오는 코로나 피해소식들, 변종이 나타났다는 소식, 경제가 참으로 위태롭다는 소식, 아프리카에서는 내전으로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 아르메니아 사람들이 결국 영토분쟁지역에서 고향을 잃고 떠났다는 소식, 이 모든 소식에서도, 우리는 한 소중한 아이에게 행하여진 양부모의 만행이 계속 드러나는 가운데 마음에 분노가 치밀고 울적해지는 한 주 였습니다. 이런 모든 안좋은 소식을 들어보면, 공통점이 있는데, 누군가가 실족되는 소식입니다. 그리고, 실족되는 사람들이 더 힘이 없고, 더 어린자들 일 수록 우리의 마음이 더 아프케 됩니다.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케 하는 자에게 화로다. 실족케 하는 일로 인하여 세상에 화로다… 그렇습니다. 실족함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실족하게 하는 이 세상과 사람에게는 화가 있다는 것입니다. 실족함 중에서도 가장 중대한 실족함이라는 것은 생명을 잃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한마리의 실족한 양을 위해 오늘도 나서시고 찾아 헤메시는데, 반대편에서는 한마리의 양뿐아니라 되도록 많은 양을 약탈하고 도둑질하여 삼키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 실족함이란 사실 믿음과 연관된 단어입니다. 영혼이 실족하는 것입니다. 믿음을 잃게 되는 것이, 그리고, 믿음을 가지려고 하는데, 그 기회마저 잃어버리는 것이 바로 실족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때처럼, 실족케 되는 사람들이 많았을 때가 있었을 까요? 지금 때처럼, 믿음을 잃고 무리에서 떨어져 나가는 자들이 많았을 때가 있을 까요? 또한 지금 때처럼, 믿음을 가지기 힘들고, 믿음의 기회마저 박탈 당하는 때가 있었을 까요? 이제는 실족케 하는 일이 너무 흔하게 일어나서, 우리의 감각이 무뎌질 정도입니다. 오늘 마가복음 9장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 중에서 가장 무서운 장, (p2) 가장 참혹한 장으로 알려진 곳입니다. (p2) 왜 그럴 수 밖에 없냐,, 실족함에 대해서 다루시고 있고, 실족하게 하는 것들의 대한 결말과 해답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9장 전체 흐름을 보면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향한 가르침과, 예수님이 제자들과 같이 겪는 에피스도입니다. 변화산상의 이야기와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는 제자들이 바로 에피소드의 종류이고, 그 이외는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오늘, 실족케 하는 일이 많은 이 세상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과 보여주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변화입니다. 변화에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바로 변화입니다. 오늘 9장은 변화가 필요한 세대, 변화가 필요한 제자들, 변화가 필요한 그리스도인들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변화되지 못하고 변화하지 않는 자들을 향해 선포하시는 가르침입니다. 그럼, 오늘 말씀을 보면서 어떤 부분이 변화되야 하는지, 무엇이 변화를 위해 필요한지 같이 보고 은혜 받길 원합니다. 첫째, 믿음 없이 그리스도의 사역을 하는 자들에게 변화가 필요하다.. 17절-18절 읽습니다.

Mar 9:17 무리 중에 하나가 대답하되 선생님 벙어리 귀신 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 왔나이다

Mar 9:18 귀신이 어디서든지 저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하여 가는지라 내가 선생의 제자들에게 내어쫓아 달라 하였으나 저희가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예수님이 변화산상에 올라갔다 내려왔는데, 나머지 제자들이 지금 씨름하고 있습니다. 죽게 된 귀신들린 한 아이를 데려온 아버지의 요구에, 귀신에게 호통도 쳐보고, 예수님의 이름을 불러가며 열심히 귀신쫓기를 하고 또 하는데도, 나가지가 않습니다. 전에는 쫓아낸 적이 있습니다. 전에는 잘 됐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안되요. 왜 그럴까요? 한번 19절 부터 또 읽어보겠습니다.

Mar 9:19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하시매 자 예수님이 지금 나무라십니다. 뭐가 없어서 문제라고 하십니까? 믿음이 없어서 문제라고 하십니다. 믿음이 있었으면 될 것이라는 것이에요. 25-27절 같이 가봅니다.

Mar 9:25 예수께서 무리의 달려 모이는 것을 보시고 그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p3) 가라사대 벙어리 되고(p3) 귀먹은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하시매 Mar 9:26 귀신이 소리지르며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나가니 그 아이가 죽은 것 같이 되어 많은 사람이 말하기를 죽었다 하나 Mar 9:27 예수께서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이에 일어서니라 자 이 일이 있고 나서 제자들과 집에 들어갔을때, 다음 구절들을 읽어보면 제자들이 물어봅니다. 왜, 우리가 할 때는 안되었습니까? 그 때 예수님이 하신 말을 우리가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Mar 9:29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기도외에는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자, 믿음과 기도의 연관성을 직접이야기 하고 계십니다. 하지만, 그전에, 이런 유, 이런 종류가 어떤 종류인지 우리가 짚어 봐야합니다. 이 아이는 어떤 종류의 실족함에 처해 있던 자입니까? 아이의 아버지가 주님께 말했습니다. 어려서부터 귀신이 불에도 던지고 물에도 던져서 그를 죽이고자 했다.. 귀신이 사람에게 기생하는 것이 아니라, 이 귀신은 그저 사람을 죽이고자 하는 종류입니다. 다르죠. 우리가 아는 귀신이랑 좀 틀립니다. 또한 어려서부터,, 라고 했습니다. 어린 아이에게 들어간 귀신입니다. 어린 아이에게 귀신이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이해하기 힘듭니다. 그들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더러운 생각을 품었던 것도 아닌데,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된 것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종류가 있다는 것이에요. 또한, 이 귀신을 벙어리 귀신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자 아이가 벙어리여서 귀신이 벙어리 귀신이라고 했는 지는 모르지만, 아이에 대해서 보다는 이 귀신을 이야기 할 때, 벙어리라고 합니다. 귀신이 무슨 장애가 있나요? 이상하죠 이런 종류가 있다는 것이. 그런데, 문제는 벙어리라는 것은 그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에요. 이런 특성을 가진 귀신을 지금 제자들이 맞닿뜨렸기 때문에, 단순히 나가라 해서 나갈일이 아니였다 이겁니다. 듣지도 못하는 귀신한테 나가라해서 알아 듣겠냐 이겁니다. 물론 예수님이 말씀하시면 틀리지만 제자들이 했을때는 안되는 것이에요. 여기까지가 우리가 외관적으로 표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부분들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이 늘 하시던 일을 하려고 하는 그 대목에서 막혀버린 것이에요. 제자들이 예수님께 믿음이 없는 세대들이라 꾸중듣습니다. 하지만, 가만히 보면 제자들만을 보고 이야기 한 것이 아닙니다. 그 세대 전체를 그렇게 이야기 한 것입니다. 아들을 데려온 아버지도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있거든 좀 도와주십시오. 이렇게 말하는 것이에요. 예수님이 그때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p4) 오늘, 이 어린 아이가 죽게 나두는 것은 끔찍한 일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도대체 이 어린 아이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잘못한게 없어요. 그런데도,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합니다. 아무런 이유없이 아무런 잘못없이 당해야 하는 약한 자들의 고통, 최악의 실족함입니다. 불에나 물에나 던져지는 것이에요. 아이가 무슨 잘못이 있고, 또한 무슨 힘이 있습니까? 마귀는 이렇게, 이유없이 순수한 생명을 파괴시키는 것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무고한 아이들이 학대당하고, 고통당하며 죽어나가는 것은, 어떤 이유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런 악한 영들이 있다는 것이에요. 그저 죽이고 파괴하는 것을 기뻐하는 영이 있다는 것입니다. 가장 먼저 믿음 없음에 대한 꾸짖음을 듣는 자는 다름아닌 그 어린아이의 부모, 아비였습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못할 일이 없느니라. 방법이 있다는 말이에요 없다는 말이에요. 방법이 있다는 말입니다. 아무런 해결책 없이 그저, 당하고 그저 실족되는 것을 보는 것 자체가 믿음없음입니다. 해결책이 있습니다. 주님께 아이를 데려오는 것 입니다. 하지만, 데려오지 않아도, 병을 낳게 했던 백부장 기억하십니까? 데려오지 않아도, 낳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데려왔어도 처음에 안됐잖아요. 데려 와도 믿음이 없이는 안 되는 것은 동일합니다. 데려오지 않아도 믿으면 되는 것이구요.. 들을 수도 없고 말할 수 도 없는 귀신들린 어린아이의 모습은,, 여러분 예수님이 꾸짖으신 믿음없는 세대의 총체적 모습입니다. 그 어린아이의 모습까지도, 믿음없는 세대에 포함되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마가복음에서 보인 사람들의 가장 큰 문제는 결국 들어도 듣지 못하고 입으로도 주를 주라 시인하지 못하는 영적 벙어리, 이것이 이 세대, 그리고, 모든 세대의 문제였습니다. 지금 아이의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며, 죽음의 위기에 늘 쳐해 있는 상태가 바로, 우리가 사는 세대의 적나라한 모습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바로, 이런 류는 뭐가 아니면 나가지 않는다? 바로, 기도입니다. 어떤 곳에는 기도와 금식이라고 표현 되어있습니다. 한번의 일회성 기도로 해서 나갈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금식이 동원될 정도의 기도라면, 쉽게 쉽게 하는 기도라는 말이 아니죠.. 내, 생명을 걸고, 내 좋은 것을 포기하고, 내 삶의 중요한 일부분을 내려놓으면서 까지 진지하고 심각하게 하는 기도가 요구된다는 말입니다. 그 사람을 생각하며 정말로 안터갑고, 정말로 마음이 안정되지 않아, 온 힘을 다해 드리는 심각한 기도를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의 사역의 자리에 있는 제자들이, 보여야 할 믿음은 바로, 이런 기도에요.(p5) 듣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하는 죽음의 위험에 처해있는 세대, 실족하는 세대를 위해, 보여야 될 믿음은 바로, 호전적이고, 결단이 담긴 기도입니다. 이것은 생명이 달린 문제입니다. 둘다 생명을 노립니다. 하나는 생명을 죽이려하고, 하나는 그 생명 살리려고 합니다. 어떻게 진지하게 기도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여러분, 믿음 없이 그리스도의 사역을 하는 자들에게 이제 변화가 필요합니다. 생명을 위해 간곡히 기도함이 필요합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길 축원합니다. 두번째,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얻는 것이 아니라, 포기하는 변화입니다. 우리 같이 36-37절 읽어봅니다. Mar 9:36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Mar 9:37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우리 주님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게 된 이유가 있습니다. 제자들끼리 열띤 논쟁을 하고 있었습니다. 누가 자기들 중에 가장 큰 자냐, 이런 논쟁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물으셨어요. 어떤 일로 이렇게 활발한 토론을 하고 있느냐? 여러분, 이제까지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많은 가르침을 두고 열띤 신학적 토론을 하고 있었더라면 얼마나 기특했겠습니까? 아니면, 어떻게 앞으로 예수님의 사역을 우리가 더 도와주고 확장할 수 있을 까, 뭔가 건설적인 토론을 하고 있었으면 얼마나 갸륵했겠습니까? 그런게 아니라, 자기들 중에 누가 크냐 이런 토론하고 있었어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와서 무슨 토론이냐 하니까,, 제자들이 보세요 어떻습니까? 34절, Mar 9:34 저희가 잠잠하니 이는 노중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왜 잠잠했겠습니까? 자기들 끼리는 그렇게 열띄게 논쟁하고 언성을 높였으면서, 예수님이 오셔서 나도 좀 끼자 하니까, 왜 아무도 대답 못합니까? 자신들의 논쟁이 유치한 것을 자신들도 알아요. 압니다. 그런데, 자기들 끼리 있을 때는 몰라요.. 누가 오니까? 예수님이 다가 오니까,,, 자신들의 무지와, 어리석음이 발각되고 인지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의 임재자체가 우리의 어리숙함을 인지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예수를 가까이에서 늘 대면하고 있다면, 이렇게 어리숙하게 될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님이 아이들 데려와 중앙에 세우시고는 이런 어린아이들 영접하는 것이 큰 자가 되는 비결이라고 합니다. 제자들 모두는 어떻하면, 일등석을 얻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p6)큰 이름을 얻을 수 있을까, 크게 되고, 큰 영광을 얻고 큰 소리치며 살까,, 그게 자신들의 전제가 되니까, 누가 크냐가 핫한 이슈가 되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얻을 것에 대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너희들이 소자를 대접하는 것을, 너희들이 작은자를 섬기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요한이 엉뚱한 질문을 던집니다. 이렇게 주님께 말합니다. 38절 Mar 9:38 요한이 예수께 여짜오되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자 갑자기 뜬금없이 왜 이런 말 하는 지 모르겠어요. 요한이 자신이 가장 많이 찔렸는지 화제를 바꾸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어쨋거나, 주님은 요한이 던진 질문에 이렇게 답하십니다. 그들을 금하지 말라. 지금 우릴 쫓지 않는다고, 그들을 갈라내지 말라 합니다. 내 이름으로 행하는 좋은 일을 하는 자들을 막지 말라 이거에요. 우리와 같은 똑같은 길을 가지 않는 다 하더라더, 내 이름으로 선한일을 하는 자들을 왜 금하냐 이것입니다. 성도님들, 네임 밸류라고 다들 들어보셨죠?. 브랜딩이라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이름의 가치가 상업적으로 돈이 된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모든 기업들은 자신들의 이름의 가치를 높이고자 엄청난 돈을 드려 이미지 구축을 합니다. 지금 예수님의 이름이 가지는 브랜드 가치를 보세요. 엄청납니다. 제자들은 그런 예수님의 이름을 독점하고 싶은 마음이 분명히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름을 도용하여 다른 사람이 귀신을 쫓아낸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이름을 로얄티도 주지 않고, 도용해서 쓰는 것이에요. 예수님을 온전히 따르는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이거 도둑맞은 기분일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자신들의 전유물인데, 누가 불법적으로 도용하는 거잖아요. 지금 같으면, 소송당하고 난리가 났을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뭐냐, 39-41절 읽어봅니다.

Mar 9:39 예수께서 가라사대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 Mar 9:40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Mar 9:41 누구든지 너희를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가 결단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자~ 특히 41절을 한번 주의깊게 보십시오. 너희를 그리스도에게 속한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을 주면 물 한잔 준 사람이 어떻게 된다,, 상을 받는 다에요. 지금 제자들이 크게 되는 것이 무엇인지로 예수님께 가르침을 받고 있던 상황입니다. 그리고, 요한의 엉뚱한 질문에 예수님이 가르침이 잠시 딴 길로 빠지는 줄 알았는데, 다시 예수님은 (p7)그 질문에 대한 답을 하시며 누가 큰 자이냐로 돌아왔습니다. 큰 상을 받는 자가 큰 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하시는 말은 다시 큰 자가 누가 될 수 있는지 동시에 대답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에게 속한자라 하여 물 한그릇이라도 대접하는 자에게 큰 상이 있다는 것이에요. 그리스도에게 속한자인지 아닌지, 우리가 끝까지 찾아가서 확인하고, 검증하고 물어보고, 그리고 나서 물을 주라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라고 했습니다. 앞에서 요한이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하는 자들을 이야기 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요지는 자신의 이름을 빌어, 능한 일을 하는 자들을 반대하고 솎아 내지 말고, 차라리, 물 한그릇이라도 베푸는 것이, 우리 스스로에게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아멘? 여러분,, 지금 실족하는 일들이 왜 생기는 지 생각해 보십시오.. 많은 교회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하여 좋은 일을 능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현상이 팽배하냐,, 같은 시각과 관점을 가지지 못한 교회들끼리, 서로, 적대하고, 다른 노선을 타며 등을 돌리고 있습니다. 같은 예수님이라는 이름의 깃발아래 있으면서, 누구는 타락했고, 누구는 변질자이고, 누구는 회개해야 한다, 우리처럼 되야한다,, 이런 풍토가 지금 만연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단을 갈라내야 함이 옳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하시는 것은 갈라 내지 마라는 것이 아니라,, 먼저는 어떤 마음이 선행되야 된다는 것을 정해주시는 것이에요. 예수님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 자들에게, 베푸는 마음으로 바라보라 이것입니다. 우리의 기준이 너무 각박하다는 것입니다. 우리와 함께 하지 않는다고, 적대하고, 니편 내편 나누고, 멸시하고, 낮게 보는 풍조를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다로 기준을 완화하고, 표용하고 대접하라 입니다. 실족하는 일이 왜 생깁니까? 편 나누기의 기준이 각박하기 때문이에요. 예수님은 불필요한 실족함이 일어나는 것을 최소한 하기 위해, 기준을 완화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으면 나를 즉시로 비방할 자 없느니라, 얼마나 기준이 완화됐습니까? 좀 있다가 비방할 지라도 일단은 괜찮다는 겁니다. 지금 즉시로 비방하지 않는다면 오케이라는 것입니다. 기준을 많이 낮추시는 것이에요. 그리고 그 기준에서 부터 너희가 섬긴다라는 것을 훈계하고 계십니다. 그러면서 42절 부터 어떤 가르침을 시작하시느냐, 바로 성경전체에서 가장 혹독하고 무서운 말씀을 하십니다.. 같이 가서 보겠습니다. 42-48절, 교독하겠습니다.

Mar 9:42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바다에 던지움이 나으리라 Mar 9:43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p8) Mar 9:45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Mar 9:47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Mar 9:48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잘 보십시오. 그리스도의 이름을 받들고 있는 자를 실족하게 됨이 얼마나 참혹한 결과를 낳게 되는 지를, 지금 제자들에게 처음으로 생생하게 묘사해 주시고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제시한 지옥불은 믿지 않는 자를 이야기 할 떄, 나온 말이 아닙니다. 소자를 실족시키는 중대한 과오를 저지르는 배경속에서 나온 말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연자 맷돌, 여러분 연자 맷돌이 뭡니까? 곡식을 빻는 것이잖아요. 주로 당나귀들이 윗돌을 돌려서 아래에 있는 곡식들을 짛이기는 아주 무거운 돌이였습니다. 그 중앙에 커다란 홀이 있었거든요. 예수님은 그 홀에 차라리 머리를 집어놓고, 바다로 빠지라 이 말입니다. 수장되는 것이 낳다.. 왜냐,, 화장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에요. 영원한 화장이요. 물에 수장되는 것은 잠시지만, 그 고통도 잠시지만,, 영원한 화장, 지옥불은 꺼지지 않는 불이라거 하십니다. 엄청난 고통이 길어질 것이라는 겁니다.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버려라,,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려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버리라, 어떤 범죄를 말하느냐, 실족케 하는 범죄입니다. 실족케 하는 범죄자들이 갈 한 장소가 기다리고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구더기가 죽지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 장소.. 우리 다시 이런 무시무시한 말씀을 하고 있었던 본래 배경으로 돌아갑니다. 제자들이 한 논쟁은 누가 더 크냐 였어요.. 누가 더 크냐,,, 여러분, 이런 논쟁이 만약 계속 되었다면 어떤 결과가 이루어질까요.. 우리 중에서, 우리 가정에서, 우리 교회에서, 우리 사회에서 이런 종류의 논쟁이 계속 이루어진 다면, 어떤 결과가 이루어지는 줄 압니까? 실족함이 일어납니다. 실족함이 일어나요. 결국 내가 커지게 보이기를 원하는 영이 지배하는 곳에서는 약한 영혼들은 실족하고 마는 것이에요. 지금 다 연결 연결 됩니다. 어린 소자가 악한 영에 의해, 물에 빠지고 불에 빠져 죽을 뻔한 적이 많았다는 것 다 연결되는 것입니다. 우리 중에 약한 자들은 이런 커지고자 하는 영이 만배한 곳에서 낙오되고 버림받습니다. 실족되는 것이에요. 또한 우리 중에, 너는 우리와 함께 하지 않는 자다, 편 가르고 낙오시키는 곳에서, 약한 자, 소자는 실족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더 뛰어나다고 하는 모든 곳에서는 누군가, 더 못한자가 희생당하는 것입니다.(p9) 그런일이 일어나게 하는 사람은, 조직은 기관은, 심지어 교회는,,, 주님이 말씀하시기에, 어떤 위험에 처해있다는 것입니까? 화장의 위험이에요. 죽지 않는 구더기와 꺼지지 않는 불이 기다리고 있다 이것입니다. 무섭지 않습니까? 그런데, 지금 세상은 안무서워 하는 자들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안무서워 하는 자들로 인해서, 실족하게 되는 자들이 얼마나 많이 생기고 있습니까? 교회안에서의 파벌과 교인들끼리의 섬기지 못함으로 인해 교회안에서 떨어져 나가는 사람들과 또 교회를 찾으로 오는 사람을 되돌리는 일이 얼마나 흔한 일입니까? 오늘 하루도, 교회발 뉴스를 듣고 그 아래 달린 댓글을 읽다보면, 실족한 댓글을 심심치 않게 봅니다. 더 이상 교회 안다닌다, 다니려고 했는데, 이제 절대 안갈거다.. 여러분, 교회가 이 사회에 끼친 좋은 영향을 사람들은 기억해 주지 않습니다. 당연한 것이에요. 하지만, 세상에서가 아니라, 바로 교회안에서 조차, 소자를 생각함이 우리가 너무 소홀히 했다는 것이에요. 교회안에서의 중심이 지금 누구 위주로 되어 있는줄 아십니까? 소위 크다는 자들 위주 아닙니까.. 오랜 시간 교회에 헌신하고, 소위 말하는 터줏대감, 터줏대감들이 교회의 관심이고, 교회 운영의 중심이고, 교회가 나아가는 방향의 잣대라면,, 당연히 교회안에서의 소자는 길을 잃는 것입니다. 믿음이 약한자들 부터 먼저 떨어져 나가는 구조에요. 지금 처럼 위기가 오고 분란이 생기는 이때, 믿음이 약한 자들 부터 떨어져 나가는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주님은 오늘 제자들에게 변화를 요구하셔서 이런 가르침을 주십니다. 누구라도, 그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시는 것 원치 않으십니다. 누구라도 실족됨을 바라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변화를 요구하십니다. 어떤 변화이냐,, 바로, 소자부터 챙기는 변화입니다. 내가 얻을 것에, 내가 커질 것에 눈이 먼 자가 아니라,, 너희 중에 가장 작은 자를 섬기는 변화,, 를 요구하십니다. 우리 중에 가장 작은 자라 함은,, 여러분,, 영적으로 보면, 바로, 듣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하는 자들일것입니다. 이해함이 부족한 자들입니다. 어떻게 보면 제자들 모두가 지금 영적 소자들입니다. 소자들끼리 누가 더 크냐고 싸우니 웃기지도 않습니다. 주님은 그래서, 너희들 중에서 더 작은 자들을 섬기라고 하십니다. 오늘 이것이 우리가 당장 이루어내야 할 변화인 줄로 믿습니다. 그러려면 포기해야 합니다. 소자를 섬기려면 내가 당장 포기해야 할 것이 많아집니다. 크게 되려고 했던 마음 자체를 포기해 버려야 합니다. 내가 소유하고 있었던 편가르는 잣대를 포기해야 합니다. 설령 옳은 것 같다 하더라도, 한 생명을 살리는 것 앞에서는 가치가 없는 잣대입니다. 그것도 안된다면, 실족하게 하는 자에게 미칠 하나님의 화를 생각해서라도, 우리는 소자를 먼저 챙겨야 합니다. (p10)오늘, 예수님께서 변화산상에 올라갔다 내려오신후, 이런 모든 가르침이 제자들에게 주어졌습니다.. 여러분 여기를 기점으로 예수님은 더 이상 군중을 상대하시는 않고, 제자들에게 집중하십니다. 제자들이 참제자 될 수 있도록 집중적으로 훈련하시는 마지막 사역을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그 출발점이 바로, 변화산상으로 제자들을 데려가셔서 자신이 변화하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제 한번 그 장면을 보도록 합니다.


Mar 9:2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 가셨더니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Mar 9:3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만큼 심히 희어졌더라 Mar 9:4 이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저희에게 나타나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거늘 엘리야와 모세가 왜 나타났는지, 어떤 말씀을 하시고 있는 지 여기 마가복음에서는 중요하다라고 안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변하여진 모습입니다.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심히 희어졌더라.. 그때, 하늘에서 소리가 나, 예수님이 성령으로 침례를 받던 그 때 임하던 같은 목소리와 같은 말씀이 들렸습니다. “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하나님이 사랑하는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것은 하늘에서 두번이나 확증한 하나님 아버지의 목소리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제자들에게만 공개된 소리가 있죠. 바로, 저의 말을 들으라 입니다. 그리고, 오늘 변화선상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해주시는 내용은 한 가지 입니다. 앞으로도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계속 이야기 하실 것은 한 가지 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입니다. 9절과 12절 보십시오.

Mar 9:9 저희가 산에서 내려 올 때에 예수께서 경계하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Mar 9:12 가라사대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것을 회복하거니와 어찌 인자에 대하여 기록하기를 많은 고난을 받고 멸시를 당하리라 하였느냐 예수님이 변화산에서 자신의 변화하는 모습을 보인 이유을 이제 생각해 봅니다. 왜 여기서부터 제자들에게 분명히 자신의 고난과 죽음, 부활에 대한 가르침을 분명히 시작하시고 있는지,, 오늘 본문 구절을 다시 보며 같이 생각해 봅니다. 오늘 본문 말씀 49절 50절, 9:49 이는 사람마다 불로 절여질 것이요, 희생물마다 소금으로 절여질 것이기 때문이라. 9:50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제 짠맛을 잃으면 너희가 무엇으로 그것의 맛을 내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p11) 이 챕터 전체는 우리가 변화됨이 필요하다는 것을 교훈하시는 챕터 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챕터의 마지막을 소금과 불로써, 끝을 내십니다. 우리가 변화할 수 있는 방법과 의의를 말씀해 주심으로 끝을 내십니다. 소금과 불,,, 이것이 무엇이냐,, 모두 희생제물을 드림에, 상관이 있었던 요소입니다. 희생제물을 드림이 곧 하나님과의 화평을 추구하는 행위입니다. 거기에 소금과 불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제물에게 가해지는 도구들이 소금과 불입니다. 여기 세가지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봅니다. 저는 마가복음 9장은 킹제임스 성경을 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좀 더 의미가 살아납니다. 어떤 종류의 사람들이냐,, 첫째, 소금으로 절여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둘째, 불로써 절여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둘다, 49절에 나오는 사람들이에요. 그리고 마지막 종류의 사람은 앞에 보았듯이, 꺼지지 않는 영원한 불에 구더기와 함께 절여지는 사람들입니다. 48절과 49절을 연결해서 읽으면, 잘못해석하기 쉽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49절에, 거하나, 곧 지옥불에서 고통받는 사람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신앙인들이 어떤 종류의 절임을 당해야 될 지를 먼저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에요. 절임 당하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50절에 무엇이라 합니까. 소금은 어떤 것이다, 좋은 것이다 에요. 너희속에 소금을 두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소금에 절임 당해야 된다는 말씀이십니다. 그게 우리의 변화의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소금과 불의 공통점은, 고기의 가장 좋은 점을 드러내 줍니다. 소금을 치면 고기의 비린내가 약해지고, 고기의 맛이 드러납니다. 부패함이 덜해집니다. 불도 마찬가지에요. 불로 구울 수록 고기에서 좋은 향이 드러나고, 맛이 살아납니다. 하지만, 소금과 불로써 절임당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신앙인들이 당해야 하는 절임이 있습니다. 김치를 담글때, 소금에 절임니까 안 절임니까? 소금에 절여야지 안에 있는 물기가 다 나오잖아요. 만약 절이지 아니하면, 숙성되는 과정에서 결국 물기가 나오고 맛이 떨어지고 불필요한 미생물이 번식해, 발효되기 전에 상합니다. 내 안에 있는 물이 다 나와야 되는 것이 소금 치는 과정입니다. 또한 고기를 로스팅 해보세요. 열이 오르면 고기에서 뭐가 우러 나옵니까. 피가 빠져 나옵니다. 불에 익히면 열에 의해서 핏기가 빠져 나옵니다. 소금은 물을 빼어내고, 불은 피를 빼어 내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맛이 베어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해야 되는 변화란 바로 이것입니다. 내가 멋있는 성인 군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축복받아 떵떵거리고 사는 크리스챤이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p12)물과 피가 따 빠져나오는 김치와 고깃덩어리가 된다고 생각하셔야 되요. 소금에 절인 배추가 힘이 있습니까? 불에 익힌 고기가 핏기를 띄고 있습니까? 아직도 생생하고 아직도 핏기있는 교인들이 지금 실족케 하는 교회 문화를 만들고 수없이 많은 소자들을 절벽아래로 떨어 뜨렸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소금을 가지고 다니라고,,, 내 물이 찰때마다, 스스로 뿌려야 되는 거에요. 그것도 아니면, 하나님이 우리를 로스팅 하시는 겁니다. 고난 당하게 하셔서 그렇게 해서라도 우리를 제자답게 희생제물답게 변화시키는 것이에요. 여러분 그래도 불보다는 소금이 낳죠, 안그렇습니까? 괜사리 불에 로스팅 당하지 마시고, 미리 소금으로 스스로를 절여가셔야 됩니다. 괜사리 소금들고 남한테 뿌리지 말고 우리가 들고 쳐야 하는 소금의 대상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그렇게 하지 못할때, 우리 교회들이 그렇게 하지 못할 때, 다음 하나님이 하시는 단계가 피폭풍이 닥치게 하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불로써, 로스팅 하시는 것 입니다. 모든 불순물들을, 우리 것들을 다 앗아가시게 하고 오로지 남아야 될 것만 남게 하시는 고난의 불을 경험케 하시는 것이에요. 하나님이 주시는 불은, 성도가 두려워 해야할 고난의 시기입니다. 지금 보세요. 우리는 모두 불에 절임 당하는 시기에 임한 것 같지 않습니까? 니다. 아니길 기도합니다. 부지런히 소금으로 절여주세요. 하지만, 이것도 저것도 되지 않을 때, 남겨진 절임은 오로지 한가지 입니다. 죽지 않는 구더기와 꺼지지 않는 불이 기다리고 있다.. 구더기와 불로써 절여지는 것입니다. 믿음 없는 세대에게 경고하시는 메시지에요. 소자하나를 회복시키지 못하고, 소자를 실족시키며, 소자를 대접하지 아니하는 교회들에게 주시는 메시지 입니다. 결론 짓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세상과의 평화를 이루시기 위해, 기꺼이 불의 고난을 감수 하시고,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모두 우리에게 쏟아 부으셨습니다. 변화산상에서 엘리야와 모세와 의논하신 것은 바로, 십자가에서 당하실 고난에 대한 것이였다라고 다른 복음서에 나와 있습니다. 십자가의 고난과 변화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것입니다. 성도님들, 우리는 평화를 이루어내기 위해, 절여져야 되는 희생제물입니다. 그게 하나님 앞에 합당한 제물이 되는 예배자의 모습입니다. 이제까지 절여지는 것 없이 살아온 신앙생활은 우리 끝을 내야 합니다. 진이 빠지고 피가 빠져야 그리스도의 향이 배여 나오고, 그리스도의 맛이 올라오는 줄로 믿습니다. 소자를 대하는 나의 마음가짐에서 부터 내가 어떤 자인지 평가되어집니다. (p13) 소자라는 것은 어린애들 뿐 아니라, 성인이여도 여전히 믿음이 자라지 못한 모든 자들, 영적 이해력이 부족하고, 말에 영적 지혜가 없는 자 모든 자들을 말합니다. 그런자들을 규탄하고 지적하는 것 보다는 그들을 갈라내어놓아야 할 대상으로 보지 말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대접하라고 합니다. 성도님들 아주 어린 아이들을 볼때, 어릴 수록 우리는 어떤 마음이 듭니까, 안쓰럽고, 불쌍한 마음이 듭니다. 실수를 해도 덮어줄 수 있는 마음이 듭니다. 보듬어 주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늘 아이들이라고 소자들이라고 부르셨어요. 그렇게 실수하고, 그렇게 알아듣지 못하고, 그렇게 도망치고 배신한다 할지라도, 예수님이 그들을 바라보신 관점은 늘 사랑이였습니다. 왜냐, 그들을 보호 받아야 될 어린 아이들로 봐 주신 것입니다. 어린 아이들은 그저 사랑의 대상아닙니까.. 그들은 조금만 잘못되도, 실족할 수 있는 연약한 자들입니다. 그런 긍휼의 마음으로 소자들을 바라봐야 하고, 나 자신도, 누군가에게는 소자라는 것을 빨리 깨달아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세상에서는 빨 수 없는 흰옷을 바로 우리가 선 이 곳에서 입게 될 줄로 믿습니다. 내 상처에 소금을 대면 얼마나 쓰라립니까, 하지만, 넘어서야 됩니다. 내가 쓰라림을 당하고 절임을 당하여 남을 섬길 수 있다면, 바로, 그것이 크게 되는 것이고, 그것이 실족한 자들을 다시 회복하는, 생명력있는 사역임을 깨닫고 행하시길 축원합니다. 이제 같이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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