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진우 목사

로마서 9장 새로운 하나님의 화폐- 믿음


1. 민족을 향한 바울 사도의 근심


로마서 9장에 이르러 우리는 한 신앙인의 가장 큰 근심을 보고 있습니다. 거스를 수 없는 하나님의 크신 계획에 자신의 민족이 하나님께 버림 받는 것이 작정되어 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미 그 버림받음은 기정사실화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신 사건이 어언 20년이 넘어가는 데도, 처음 반짝했던 유대인들 중의 부흥은 지속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아니 시간이 지날 수록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인을 더 박해하기 시작했고, 이방인으로 넘어간 복음의 혜택과 은혜는 유대인과 그리스도인 사이 그 벽을 더 높게 쌓아가는 것 같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것이 자신의 노력함으로 해결되어지는 문제가 아님을 알 수 있었습니다. 더 전도하고, 하나님의 기적과 은혜가 더 함께 한다고 해서, 이 문제가 해결 되어지지 않음을 아는 곳까지 바울사도는 이르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민족이 처한 그 상황을 바꿀 수만 있다면 그는 자신이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거하는 곳으로부터 끊어져도 상관이 없다라고 고백 하고 있습니다.

Rom 9: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여기서 우리 성도들이 배울 점이 분명 있습니다.

누군가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어 구원 받는 것 보다 좋은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하나님의 뜻을 거스릴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아무리 좋은 일이고 우리가 바라고 기도하는 것이라 해도 때로는 일어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물론 바울은 그것이 종국에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질 계획이라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보는 때에, 자신이 원하는 때에 이루어지 않을 것을 알고 있다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방식대로, 원하는 때에 일어나지 않는 일들이 있을 때,, 내가 서원하고 내가 정말 바라지만, 그렇지 못할 때가 있을 때, 우리들은 화를 내기도 하고 좌절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서러움을 토해내고 잠시 돌아서기 까지 할 때도 있습니다.


바울사도에게서 배웁시다. 그는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있습니다. 아니 자신을 더 드려서라도 되길 원하는 마음은 여전히 붙들고 있습니다. 바울은 여러 번 자신의 발을 털어내며 이제는 이방인으로 내가 향하리라 선포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돌을 맞고, 모욕을 당하고, 거짓 참소를 당하고, 암살계획을 당하고,, 이런 모든 것을 겪을 때마다, 바울이라고 화가 나지 않고, 바울이라고 이 동족에게 정이 떨어지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아니라는 것입니다. 잠시 그런 마음이 들었을지언정, 그의 마음속엔 자신의 민족을 향한 사랑이 누구보다 뜨거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말한, 원수를 사랑하라는 그 계명을 지키는 마음 아니겠습니까? 바울의 파멸을 원한 유다 민족에게 바울은 자신의 생명을 다해서라도, 그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길 간절히 소망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에게 붙어있는 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는 자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가 무엇인지, 그 은혜의 혜택이 무엇인지,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기에, 누구보다 더 그 가치를 체감하고 삶에서 누리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그 은혜에서 끊어진다 할지라도 자신의 원수처럼 행하는 유다 민족의 구원 보기를 간절히 원한다 라는 것입니다.


한 가지를 더 교훈받기 원합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바울 사도 만큼 체험하고 알게 되는 것..

우리는 은혜를 꼭 일차적으로 체험해야 느낄 수 있다 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그럴 것 같으면 모든 성경이 우리의 체험적 요소를 더 강조했어야 될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종교적 체험 요소를 강조하기 보다, 늘, 우리로 말씀의 깨달음을 강조합니다. 우리의 결단과 행동을 강조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그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우리로, 그리스도의 은혜가 무엇인지 이해하게 만들기 위해 많은 글들로 남겼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는 체험할 수 있는 현실이자 깨달을 수 있는 마음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가 무엇인지 우리는 더 깊이 깨달아야 더 넓게 사역할 수 있을 줄로 압니다. 바울도 마찬가지 그리스도의 은혜의 깊이를 깨달았기에, 자신의 대적들마저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으로 사역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2. 유다민족의 문제


그럼 도대체 왜 유다 민족은 예수의 사역과 죽음, 부활을 가장 가까이에서 체험했음에도 누구보다도 더 고집스럽고, 이 은혜를 거부하는 데 앞장 섰느냐 이것입니다. 바울도 이 부분에 대해서 많은 기도와 고찰을 했을 것입니다. 도저히 하나님의 행하시는 방식이 이해가 안 갔을 겁니다. 왜, 하나님의 백성 유다민족을 통해 복음이 세상에 전파되지 않을 까. 왜 이방 민족은 오히려 복음을 받아들이는데, 유다 민족은 복음을 거부하고 복음을 훼방할까?

그들에게 4절에 보듯이 양자 됨이 있고, 영광이 있고, 언약이 있고, 율법이 있고, 예배와 약속이 있고... 그리스도도 그들의 혈육이요, 그들의 조상을 통해서 났는데, 왜, 하나님의 말씀이 유다인들에게는 이루어지지 않고 폐하여 진 것 같이 되었을 까?

이 현상을 두고 바울은 많은 고민을 했을 것입니다. 그가 알게 된 하나님의 뜻은 6절에 잘 나옵니다.

Rom 9:6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바울의 결론 중 하나는 이 보이는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이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씨가 다 약속을 받은 것이 아닌 것처럼, 이삭의 씨가 다 약속을 받은 것이 아닌 것처럼, 야곱의 씨 12 지파가 다 왕의 지파가 되지는 않은 것처럼, 유다 지파중에서도, 모두다가 바빌론 시절 남겨진 자가 되지 않았던 것처럼,, 결국 그리스도에게 택함을 받은 자도 모두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지금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지금 그리스도의 은혜의 자리로 오는 자들은 엄청난 택함을 받은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11절에, 이 선택에 대해서,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시려고.." 라고 기록합니다.


3. 문제가 아닌 하나님의 선택


이것을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의 영역이다 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동족 이스라엘이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반대하는 것도 하나님의 주권의 영역이다 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택하신 방법이니, 이것은 문제라고 볼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방법은 문제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해결책을 만들어 내십니다. 혼란을 불러 오는 것이 아니라, 질서를 세우십니다. 죽음이 아니라 생명이요, 실수가 아니라, 계획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하나님에게 따질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14절에 이렇게 바울 사도가 기록합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겠느냐? 하나님께 불의가 있겠느냐?"


누구는 택하시고 누구는 택하시지 않는 하나님의 선택은 우리 모두를 향한 하나님의 선한 계획이고, 하나님의 해결책이므로 그 방법에 대해 우리가 왈가불가 할 수 없다 라는 것입니다. 15절에 이렇게 또 기록합니다.

Rom 9:15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하나님의 경제학, 정치학, 사회학, 종교학, 심리학등, 인간을 향한 모든 운영의 방식안에서의 가장 큰 틀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입니다. 하나님이 긍휼을 베푸냐 안 베푸냐가 이 모든 상호작용간의 기본 틀이라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하나님의 선택하심도, 그의 긍휼을 따라 이루어진다라고 합니다.

애굽의 바로를 들어, 그가 하나님을 대적하고 이스라엘을 대적하게 하신 우두머리로 삼으신 것도 하나님의 선택이라고 하십니다.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우리는 이 말씀이 모세에게나 어울릴 말씀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바로의 택함을 두고 하신 말이다 이 말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실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원하는 자를 완악하게도 하신다 이 말을 바울 사도가 하고 있습니다.

그럼,, 이런 말도 우리가 할 수 있죠. 마음을 완악하게 하시는 자가 하나님이라면, 하나님이 죄를 짓게 하는 것이 아니냐? 누가 하나님의 뜻을 스스로 대적하여 그 완악한 마음에서 돌이키겠느냐.. 내가 이렇게 된 것이 하나님이 작정하신 것이라면 나의 잘못이 아니지 않느냐? 바로가 완악했던 건 하나님의 잘못이 아니지 않느냐? 오히려 하나님을 탓할 수 있지 않느냐?

하지만, 바울 사도는 단호히 이야기 합니다.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에게 반문하느냐?"

"하나님이 귀한 그릇도 천한 그릇도 그가 만들 권한이 없느냐?"

그리고, 천한 그릇에게라도 하나님은 긍휼을 베풀었다 라고 말합니다.


4. 사람의 의무

Rom 9:22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진노의 그릇으로 작정된 자들에게까지 미치고 있다는 말입니다. 바울 사도가 하고자 싶은 말은 그들에게도 그 긍휼하심을 따라 돌아설 분명한 기회가 있다는 말입니다. 진노의 그릇으로 작정된 자들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긍휼하심의 큰 틀 안에 있다는 말입니다.

그 말인즉 하나님의 긍휼하심은 하나님의 택정하심 보다 더 초월적인 가치라 이 말입니다.

그 말인즉 하나님의 긍휼하심은 하나님의 택정하심 보다 더 초월적인 가치라 이 말입니다.

그의 진노하심을 보이고자 작정된 자들이 있고, 그의 영광의 부요함을 보이고자 작정된 자들도 있으니, 모두가 하나님에게는 쓰임받는 선택이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 쪽만 긍휼을 입은 수혜자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5. 사람의 결과

Rom 9:27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결국 바울사도는 다시 과거의 일과 똑같이 되풀이 되는 하나님의 이코노미를 보고 저술하고 있습니다. 과거에도 이스라엘의 그 많은 사람 중에 렘난트, 곧 회귀한 자는 몇만도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망하고, 유다가 망하고, 결국 하나님의 긍휼의 선택함으로 택정되었던 자는 돌아왔던 자들 일부였다는 것이고 그 일부로 다시 나라가 형성되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또 다시 유다는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있었고, 결국 일부만이 구원을 얻게 된 상황이라 이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긍휼의 이코노미 이다..

손해가 아닐까? 하나님의 입장에서 이것은 남는 장사가 아니라, 밑지는 장사가 아닌가? 의심해 볼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마지막에 바울은 서술하고 있습니다.


6. 이방인을 향한 결과


Rom 9:30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Rom 9:31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의의 법을 쫓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고,, 오히려 의가 아닌 믿음을 쫓아간 이방인들이 먼저 의를 얻었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법이 주어진 이유는 법을 숭배하고 법을 의지하라가 아니라, 법을 통해 인간의 한계와 인간의 악함을 알고, 믿음으로 은혜를 구하려는 데 이르게 하기 위한 방편으로 먼저 이스라엘에게 법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율법을 보좌에 올리고, 예수를 십자가라는 곳까지 내렸습니다. 왜 그렇느냐? 예수는 그들에게 거치는 돌이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그들에게 있어 율법을 통한 구원이 아니라, 믿음을 통한 구원을 전파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의 대상이 나사렛에서 자란 이름 없는 목수의 아들, 예수였다는 것이 너무 싫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 해서 그렇게 까지 싫어할 이유가 있었을까?

유대인의 지도자들은 이미 법이란 것을 자신들의 인장으로 삼고 살았습니다. 법을 통해 모든 것을 확립했고, 법을 통해 백성을 다스렸으며, 법의 권위로 민족의 살아갈 삶의 방식을 일구어낸 상태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버린 과거의 실수를 되풀이 하지 않으려고 했던 것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하나님의 법은 조항이 아니라, 법에서 강조하고 있는 긍휼의 마음입니다. 긍휼의 마음으로 삶을 살라였습니다. 하지만, 긍휼의 마음 보다는 법의 조항을 따라 살며 이미 굳어진 유다 백성은 예수를 보고 몸서리 치고 그를 거부했던 것입니다.


법도 긍휼을 이야기 합니다. 물론 정의를 이야기 하지만, 정의라는 것도 긍휼의 범주 안에 있기에 정의가 성립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도 늘 긍휼을 이야기 했습니다.

법도 예수도 둘 다 긍휼을 이야기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법에 대해 가르칠 때 늘 법의 진정한 목적을 다시 긍휼로 상기시켜준 이유입니다.

하지만, 법에 없는 것이 있습니다. 법과 매우 동떨어진 개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믿음과 법은 아무 상관이 없는 가치들입니다.

법도 긍휼을 이야기 합니다.예수도 긍휼을 이야기 했습니다. 하지만 믿음과 법은 아무 상관이 없는 가치들입니다. 여기에 새로운 하나님의 이코노미가 도래한 것입니다.

법을 지킴이 의를 이루는 과거의 이코노미였다면,

믿음을 가짐이 의를 이루는 현재의 이코노미라는 것은 비웃을 만한 것이기 때문에 유다인들의 거부대상이 됩니다.


맞습니다. 믿는다고 해서 의를 이루고 의가 내 것이 된다고 하면 그것보다 불공평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믿음이라는 것이 예수를 통한 새로운 세상의 새 화폐가 되었습니다. 행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믿음을 가진 자가 은혜를 얻게 됩니다. 법을 지키는 자가 아닙니다. 믿음을 가진 자가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법을 지키는 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믿음은 그저 아무런 믿음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로지 한 종류의 믿음이고 누구도 그것을 위조할 수 없는 종류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 곧 하나님이라고 믿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입술로 시인하는 믿음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끝없는 하나님의 은혜의 화폐를 조달 시켜 준다는 것입니다. 유대인에게 거치는 돌이 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과거 법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께 의를 쌓는 행위였고, 의를 쌓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방도였다만, 이제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통치하시는 방법, 그 이코노미가 변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예수로 인해서 생긴 변화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구원자로 마음으로 믿어 입에 시인할 때 내게 의가 생긴다는 것. 얼마나 놀라운 변화인지 우리는 깨달아야 될 것입니다. 그 의가 내게 있으므로, 내가 하나님의 은혜의 수혜자가 된다는 것, 놀라운 이치입니다.


아직도 유대인은 과거의 이코노미 체제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 이방인은 새로운 체제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 체재로 인해, 하나님은 당신의 긍휼을 모든 세상사람에게 베풀 방도를 마련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바울은 가슴 아프지만, 하나님의 방식을 믿고 소망하는 것입니다. 결국 자신의 민족 유대인들도 은혜의 수혜자가 될 것을 바울도 믿고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안에 있는 믿음의 가치를 자신의 동족들도 인정할 날을 바울은 믿음으로 바라보며 여전히 그들을 붙잡고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모습이 로마서 9장의 이야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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