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h 2:1 사흘 되던 날에 갈릴리 가나에 혼인이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Joh 2:2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인에 청함을 받았더니
Joh 2:3 포도주가 모자란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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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 2:14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의 앉은 것을 보시고
Joh 2:15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어 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Joh 2:16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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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은 가정의 달이다. 요한복음 2장과 가정이 연관이 있을 줄은 사실 생각하지 못했었다.
이 2장은 사뭇 달라 보이고, 전혀 연관성 없어 보이는 두 사건이 적혀있다.
가나의 혼인잔치 사건과 성전 정화의 사건이다.
그런데, 그 차이점이 가정에 관한 주제로 매꾸어 지고 하나로 이어진다.
첫번째 에피소드 가나의 혼인잔치는 요한복음의 첫번째, 이적으로 분류된다. 요한복음은 총 7개의 이적으로 사람들이 주로 이야기한다. 하지만, 자세히 볼수록 이적의 수는 더 많다. 하지만, 모두들 첫번째로 이 가나의 혼인잔치라는 것에는 동의한다.
벌써, 가정의 냄새가 물씬 풍기지 않는가?
혼인 잔치,, 예수의 어머니.
우리 말에는 어머니도 거기 계셨다 하지만, 사실 원문을 보면 '도'라는 뉘앙스는 없다. 어머니라는 말이 예수님의 이름앞에 선행한다.
"ην η μητηρ του ιησου εκει"
다음절에 '도'라는 δε 는 오히려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붙여진다.
"εκληθη δε και ο ιησους και οι μαθηται"
이것만으로도 우리는 어머니가 이 가나 혼인잔치의 주역임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또한 가장 첫번째, 이적의 사건으로 가정의 시작을 알리는 혼인 잔치를 소재로 삼아지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가정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가정은 연합을 의미한다. 두 몸이 하나가 되는 것을 상징한다. 그런 기쁨의 자리,시간에, 와인이 떨어져 버린 것이다.
와인이 무엇을 상징할까? 와인은 요한복음에서 기쁨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가장 첫번째로는 예수님의 흘리실 피를 상징한다. 마지막 만찬 때, 잔을 들고 다시는 포도주로부터의 열매를 그날이 되기까지 마시지 않겠다던 말씀을 하실 때, 지금의 포도주는 기쁨의 포도주가 아니라, 자신의 희생으로 베풀어지는 피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왜 마지막 만찬 때, 포도주를 마시는 가? 피는 생명을 이야기 한다. 그리고 제자들은 예수님의 잔을 돌려가며 마시게 되었다. 그럼으로, 그들은 한 유기체, 한 몸이 되었음을 말씀하신 것이었다. 그럼으로 포도주를 나눈다는 것은 연합을 의미하고, 생명을 나눈 것이고, 한 가정이 된 것을 의미한다.
"사흘 째 되던 날"-- 이 말도 우리의 귀에 익숙하다. 사흘 째는 늘 삼일 후를 이야기 한다. 예수님의 부활을 의미한다. 벌써 첫번째, 기적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흘리실 피와 부활, 그 속에서 이루어질 연합, 새로운 공동체를 엿볼 수 있다.
그 가운데 예수님의 어머니가 나온다. 예수님의 어머니의 이름은 이 요한복음에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여자라는 명칭으로써 이 복음의 메시지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여자는 곧 신앙의 공동체, 믿음의 성도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여기서 특별히 여자는 이스라엘, 옛 신앙의 공동체, 구약의 신앙의 공동체를 의미한다. 신부로써가 아닌, 어머니로 묘사되는 것은 교회가 아니고 이스라엘이다.
여섯개의 항아리가 상징하는 것도, 율법과 관련이 있고, 율법의 정결의식, 곧 율법의 포커스와 율법의 한계를 의미한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한계를 뛰어넘는 일을 하시러 오셨다. 끊임없이 씻어 버려 져야하는 물로 채우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끊임없이 마시기 위해 내어 줄 수 있는 기쁨의 원천을 주시려고 오셨다. 우리의 연합, 새로운 가정의 축제를 끝이 없게 지속하실 수 있는 분은 바로 이 예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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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에서 이루어지는 일도 동시에 보자. 우리는 사뭇 상인들을 쫓아내는 이 역동적인 장면에 눈이 뺏긴다. 하지만, 잘 보면 성경이 초점을 맞추고 비추 는 장면이 있다. 그것은 17절과 22절에 나오는 제자들이다.
Joh 2:17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Joh 2:22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또한 우리가 간과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자신의 아버지라고 말하고 있는 그 자리가 어디 인지 이다.
이방인의 뜰이라고 하는 이 장소는 모두가 드나들 수 있는 성전 안이지만, 성전 바깥 같은 장소였다. 이방인들은 여기까지 출입이 가능했고, 여기서 기도를 하든지 해야 했다. 미문을 통해서 들어가는 다음 장소는 여자들의 뜰이고, 그리고 이스라엘 남자들이 들어갈 수 있는 장소가 또 따로 있었다. 예수님이 서신 곳은 이방인의 뜰이다. 그곳에서 장사를 하는 사람들, 돈을 바꾸는 사람들은 사실 성전의 종교활동을 피해 꼭 필요한 자들이다. 황제의 얼굴이 새겨진 화폐를 부정히 여기던 유대인들은 거기서 돈을 성전돈으로 환전하게 했고, 또 멀리서 오는 사람들을 위해 여기서 제물에 바칠 양이나 비둘기도 판매한 것이다. 어차피 진짜 예배는 안에서 이루어지니 모두가 이곳에서 이런 활동이 이루어지는 것에 반발할 사람들은 없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곳에 서신 것이다. 그리고 이곳에서 채찍을 만들어, 하나하나 쫓아내기 시작하신다. 이곳을 성전이라 하신다. 안에 들어가신 하신 말이 아니라, 모두가 성전이라 생각하지 않았던 그곳에 서서 이곳을 아버지의 집 성전이라 외치신 것이다.
이것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 예수님은 성전의 범위를 확장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방인의 자리까지를 아버지의 집이라 말하시는 것이다. 그렇담, 아버지의 집이, 확장되는 것이고, 아버지의 가정이 넓어진다는 의미이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경계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냥 되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말씀하신다. 이 성전을 헐라.
성전이 헐어져야 한다. 그리고, 삼일만에 다시 지어져야 한다. 또 다시 '삼일'이란 말이 앞서 가나의 혼인잔치 이야기에서 처럼 등장한다. 다시 죽음과 부활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채찍으로 제물 될 동물들을 쫓아내셨다. 이제 필요한 제물은 오로지 하나이다 라는 암시일 것이다. 자신이다. 자신의 몸이 채찍으로 헐어져야 하고, 십자가에서 찢어져야 한다.
더 이상 사람의 손으로 지은 건물이 이방인 까지를 포함할 성전이 될 것이 아니라, 헐어졌다 다시 지어질, 부활의 몸, 예수의 몸이, 하나님께로 모두를 연합시키는 성전이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성전과 포도주, 가나의 혼인잔치와, 헐어지고 다시 지어질 성전은 예수님의 피와 몸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둘 만으로 만이 새로운 가정, 새로운 연합체가 창조되는 것이다.
요한복음을 또 다른 창세기라고 한다. 예수님의 오심으로 새로운 창조역사가 시작되는 시기이다. 6일 째, 가정이 만들어 졌다. 이제 여기서 예수님의 오심과 함께, 새로운 가정이 창조되는 것을 본다.
제자들은 이 장면을 보고 믿었다 한다. 바로 제자들이 믿음으로 가족이 되는 것을 보여준다.
예수님의 말씀을 보고 믿음으로 가족이 되는 레퍼토리들이 요한복음의 표적이다.
우리에게 있어 표적은 무엇인가? 이것보다 더 큰 표적이 있을까?
예수의 몸과 피에 의해, 말씀을 통해 그것을 믿음으로 한 공동체가 되는 것.
오늘도 요한복음은 많은 암시를 통해, 신비한 비밀을 우리에게 전달해주고 있음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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