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sa 47:1 너희 만민들아 손바닥을 치고 즐거운 소리로 하나님께 외칠지어다
Psa 47:2 지존하신 여호와는 엄위하시고 온 땅에 큰 임군이 되심이로다
Psa 47:3 "여호와께서 만민을 우리에게, 열방을 우리 발 아래 복종케 하시며"
Psa 47:4 우리를 위하여 기업을 택하시나니 곧 사랑하신 야곱의 영화로다 (셀라)
Psa 47:5 하나님이 즐거이 부르는 중에 올라가심이여 여호와께서 나팔 소리 중에 올라가시도다
Psa 47:6 찬양하라 하나님을 찬양하라 찬양하라 우리 왕을 찬양하라
Psa 47:7 하나님은 온 땅에 왕이심이라 지혜의 시로 찬양할지어다
Psa 47:8 하나님이 열방을 치리하시며 하나님이 그 거룩한 보좌에 앉으셨도다
Psa 47:9 열방의 방백들이 모임이여 아브라함의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다 세상의 모든 방패는 여호와의 것임이여 저는 지존하시도다
이 아침도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당신에게 축복이 있길 기도합니다.
47:6 찬양하라 하나님을 찬양하라 찬양하라 우리 왕을 찬양하라
47:7 하나님은 온 땅에 왕이심이라 지혜의 시로 찬양할지어다
זמרו אלהים זמרו זמרו למלכנו זמרו׃
כי מלך כל־הארץ אלהים זמרו משׂכיל׃
자므루 엘로힘 자므루 자므루 르말케이누 자므루
키 멜렉크 칼-하아렞쯔 엘로힘 자므루 마쉬킬
찬양에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오늘 시편의 무드를 우리는 같이 느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기쁨과 감사이죠. 넘치는 기쁨과 즐거움일 것입니다. 찬양은 슬픈 애가도 있지만, 찬양은 주로 기쁨을 위해서 지어지는 노래입니다.
찬양은 음악입니다. 음악은 우리의 감성을 자극합니다. 운율과 박자와 음정, 가사 모두가 조화를 이루어 우리안에 어떠한 기분이 들게 만드는 것이 노래입니다.
그 중에서 우리는 찬양, 곧 하나님에 관한 노래를 오늘도 부르고 있습니다.
자므루 엘로힘 자므루// 자므루 르말케이누 자므루//
이렇게 불렀을 가사의 내용은 분명 어떤 아름다운 운율과 같이 하나님을 경배하러 온 많은 자들과 성가대와 제사장들과 함께 성전에서 불려 졌을 겁니다. 무려 3000년이 지난 그 당시 그들이 불렀던 찬양의 음정과 박자는 모두 사라져 버렸지만, 그 가사는 오늘까지 시편을 통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자므루 엘로힘 자므루:찬양하라 하나님을 찬양하라."
" 자므루 르말케이누 자므루: 찬양하라 우리의 왕을 찬양하라."
확실한 것은 좋은 찬양일 수록 우리의 입에 머무는 횟수가 잦고 그 기간이 더 길다는 것입니다. 3000년전의 불려진 이 하나님에 관한 노래가 아직 잃어버리지 않은 요소가 있다면, 그 가사의 내용과, 반복의 형식일 것입니다. 찬양에 흔히 반복이 많이 나옵니다. 반복이라는 것의 특성을 우리가 많이 간과 할 수 있는데, 입술의 반복은 상당히 희한한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정한 단어와 음절의 반복들은 사람으로 하여금 무아지경으로까지 가게 만들수 있는 희한한 기능이 있습니다. 우리도 찬양의 후렴구를 무르익은 예배의 열기 중 끊임없이 부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계속되는 반복의 의해 어느 순간부터 처음에는 없던 마음의 느낌도 일어나는 것을 경험한 적이 있을 겁니다. 기도할 때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호칭, "주여", "아버지," 뿐 아니라, '주시옵서소', ' 믿습니다' 등 주로 나만이 자주 반복하는 단어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특정한 어감을 가지고 있는 단어나 소리음을 반복하면서 경험해 봤던 마음의 느낌이 있을 겁니다.
지금은 많은 교육시스템에서 잘 사용하지 않지만 외워서 소리내서 반복하여 말하기는 과거세대의 많은 문화들의 주요 교육 방식이었습니다. 반복되는 단어나, 소리가 만들어내는 효과가 분명히 있습니다. 심지어 유행가나 광고 음악에서도, 이것을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신앙인들의 찬양은 단순히 감정과 소리가 배합되어 창출되는 아웃풋이 아니기를 소원합니다. 우리 신앙인들의 찬양은 감정도 소리도 있지만, 거기에 그 감정과 소리의 근본이 되고 있는 뭔가 더 심오한 것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찬양의 소리에서 그것을 7절의 마쉬킬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이해하는 것, 곧understanding 을 이야기 하고, 고려하는 것 considering 을 이야기 합니다.
우리의 찬양은 소리에 따라 반응하는 자연적인 인간의 감수성인 측면에서 시작하고 끝날 것이 아니라, 먼저, 이해함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내가 이해하지도 못하고, 내가 경험하지도 못한 것을 찬양하면서 감사와 기쁨이라는 감정의 영역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조작하기도 쉽고, 타락되기도 싶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제국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을 본 따 만든 거대한 신상에 절하라고 했을 때, 그는 여러악기를 동원한 음악을 사용했습니다. 웅장한 성당에서 울려퍼지는 성직자의 챈트에 내가 감격을 받고 눈물 흘릴 수도 있습니다. 정작 라틴어로 울려퍼지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하나도 못 알아들어도 '은혜(?)'가 됐다라고 고백하는 경우가 있고, 그것이 나의 찬양이었다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시편의 찬양은 그것이 이해와 함께 이루어져야 하는 찬양이라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해이냐? 하나님께서 하신 일과,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내가 이해하고 그것이 내게 감사와 찬양이 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내가 볼 수 있게 됨으로 경험하는 이해입니다.
Psa 47:2 지존하신 여호와는 엄위하시고 온 땅에 큰 임군이 되심이로다
지존하신 하나님--- 높고 낮음의 차이를 우리가 이해할 수 있고,
여호와는 엄위하시고--- 두려워 할 만한 하나님을 우리는 볼 수 있어야 하며
온 땅에 큰 임군이 되심이로다-- 하나님께서 이 땅의 왕이시라는 것을 실감해야 합니다.
사실 이것을 경험적으로 이해한 자들이 이 찬송을 지었습니다. 포위된 성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입은 자들이고, 포로를 돌이키시는 하나님의 큰 능력을 보았던 자들입니다. 그들을 죽음에서, 환란에서 건지시는 하나님, 이방중에 높이심을 받으시는 하나님을 경험했던 자들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체험으로 이해하는 부분이 매우 적습니다.
시편기자는 이런 경험이 꼭 극한 상황에서만 일어나는 경험이라 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과제는 시편의 기자가 찬양할 수 있던 배경이 되는 이런 하나님에 대한 이해함을 우리의 일상에서 체험하는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높으신 것을 내가 어떻게 이해했습니까? 어디서 그것을 이해하게 됐습니까?
하나님이 두려워 할 만한 대상이라는 것을 말로는 고백했지만, 그것을 참으로 이해를 했습니까? 하나님께서 지금 온 땅에 왕이시라는 것이 우리가 늘 외쳐왔던 표현이지만, 실질적으로 그것은 나에게 전혀 이해되지 못한 채로, 고백되는 횟수가 더 많은 것이 아닙니까?
이해하지 못해도 반복하면 그것이 찬양이 주는 효과를 주는 것처럼 생각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시편의 기자는 이해하는 것으로 찬양하라 하고 있습니다.
오늘 반복속에 느껴지는 찬양의 무드가 비어지지 않고, 꽉 채워질 수 있는 요소는 바로, 찬양속에 어떤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해가 되고 있느냐를 우리가 공감하는 것일 것입니다. 내 삶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해되어 지기를 오늘도 바라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여러가지 방법으로 우리와 소통하시려고 합니다.
지혜의 시로 찬양할 지어어다: 내가 이해할 수 있는 하나님에 대한 것에서부터 감사와 찬양을 드립시다. 거기서 부터 시작이 아니겠습니까? 남이 이해하고 있는 하나님 보다, 오늘 나의 일상에서 내가 감격해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업적이 하나도 없을 까요? 수십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우리가 찬양의 시로 만들기 원합니다. 그것을 가지고, 우리가 반복하고, 운율로 만들기 바랍니다. 남의 찬양을 부르기 보다, 나의 찬양을 부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럴때, 우리가 만들고, 우리가 부르는 찬양이 더 많아지고, 더 커질 것이라 믿습니다.
하나님이 열방을 치리하심을 내가 이해할 수 있기전에, 하나님이 나를 치리하고 계심에 오늘 주목하십시오. 열방을 우리 발아래 복종하게 하실 그 미래를 먼저 이해하기전, 지금 복종되야 할 나 자신을 어떻게 하나님의 발아래 자진하여 무릎꾾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십시오. 세상을 굴복시키는 만큼이나, 나를 그의 주권아래 복종시키는 것 또한 대단한 하나님의 능력이십니다. 그런 하나님을 만나고 이해하고 그것을 시와 찬양으로 반복하여 부를 때, 오늘 시편을 지은 기자의 마음의 상태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기뻐하고 늘 찬양할 수 있을 까 생각하고 바라며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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