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0월의 첫째날, 이제 두 달이 있으면 2020년 한해도 저문다. 두 달후 한해를 돌아보는 것 보다 지금 부터 돌아 보는 게 덜 부담이 될 것이라 생각이 되며 한 해를 생각으로나마 정리하는 시도를 해본다.
2020년은 당연히 코로나의 해로 역사적으로 기억이 될 것이다.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역사적, 경제적 여러가지 평가가 이루어 지기까지 오랜 시간과 연구가 필요하겠지만, 나에게 있어 우리 교회에게 있어 코로나라는 것이 무엇인지 지금부터, 그리고 앞으로도 쭉 고심하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일이라 생각이 든다.
코로나는 우리 교회에게 여러가지 준비되지 못했던 질문들을 안겨주었다.
먼저, 도대체 예배가 무엇이냐? 그리고, 더 근본적으로는 21세기 세대에 이 교회란 무엇이냐라는 우리에게 각성을 요하는 심층적 질문을 던져주었다. 이 질문도 더 세부적으로 더 가지치기 하며 나누어 질 수 있을 것이다.
교회와 정부와의 관계, 교회와 이웃과의 관계, 교회와 교회들과의 관계, 다른 종파들과의 관계, 사역자들과 평신도들과의 관계등 모든 관계에서 교회의 역활과 존립 목적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을 해 보아야 할 터이다. 교회의 하나님과의 관계를 정립함에 있어 바로, 이런 관계의 영역들이 선정립이 되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교회가 무엇인지를 바라 볼 수 있는 것이 아닐 까 생각해 본다.
어려운 질문들에 앞서 현재의 상황을 진단해 보고, 거기서 부터 거꾸러 들어가는 생각을 해본다.
먼저, 지금 교회의 상황들은 좋지 않다는 것은 모두 공감한다. 가장 가까이에서 40년을 목회해온 지인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지금만큼 목회가 재미없었던 적이 없다고 한다. 교인보고 교회를 오라고 권면할 수도 없는 지금의 상황에서, 홀로 새벽기도실에서 오지 못하는 교인들을 대신해 자리를 지키며 기도하시는 사역자들의 곤고함에서 먼저 현재의 교회가 이전같이 모일 수 없고 예배 할 수 없음을 경험하는 심리적 트라우마가 가장 큰 부정적 영향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이 어려움을 호소하는 것은 개척교회나 대형교회나 그 사이에 있는 중소 교회들이나 별반 다른 것이 없을 것이다. 모두가 온라인 교회를 해야하는 상황이 왔었고, 모두가 20명 이내에 예배해야하는 상황이 있었고, 이제는 모두가 50명 이내에 예배를 드려야 하는 상황이 왔다.
20명 교회에서 10명이 드리는 것과, 500명 이던 교회에서 10명이 드리는 것은 엄청난 가시적 차이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심리적인 부분에서 그 여파가 더 클 것이다. 만약, 정말 만약에, 한국교회에서 더 이상 50명 이상이 동시에 예배할 수 없는 상황으로 굳혀져 버린다면, 교회 전반에 어떤 지형 변동이 일어날까 생각을 해보는 것이 이 상황을 점검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만약, 이 사태가 영원히 지속된다면, 만약, 이제까지 드리던 방식으로 더 이상 예배할 수가 없다면, 과연 그 때, 교회에서 예배한다는 것은 무슨 말인지, 다시 말해 도대체, 예배가 무엇인지, 교회가 무엇인지 정의가 바뀌는 것인가? 그런 상황에 따란 바뀔 정의였다면 바꿔 말하면, 지금의 예배와 지금의 교회의 정의가 올바르지 않았고, 단순히 시대발상적인 정의였다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지 않은가?
아예 모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50명 미만으로만 모일 수 있다면 교회들에 어떤 변화가 올까? 이미 50명이 넘지 못하는 교회는 아주 많다. 한국의 개신교를 6만 교회, 15만 성직자, 1000만 성도’라고 표현한다. 이들 6만 개 교회 중 80% 가량이 미자립 소형 교회다. (출처: https://news.joins.com/article/23795502) 어차피 줄어들고 줄어들어 50명 이하의 교회가 대다수라고 봐도 이상치 않다. 그럼, 가장 큰 변동을 겪어야 할 교회들은 중대형급 교회들이다. 한국교회에서 대형급 교회들이 50명 이상 예배를 할 수 없다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대형급 교회들에 대한 심층적인 분석이 담긴 저서들은 이미 많이 있다. 한국교회에 미치고 있는 장단점이 다 있을 것이다. 그런 분석이 아니라, 대형교회가 지금 처럼 작동하지 못한다면, 대형교회 뿐만 아니라, 군소 교회들에게까지, 아니 사회 전반에 미칠 영향이 무엇일지 생각을 해 볼 필요가 있다.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예배가 무엇인지, 교회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 보게 하는 우연치 않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우선 대형교회들은 지금의 사태의 충격을 최소한 완화하고자 많은 시도를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5부였던 예배를 7부 8부 10부로 쪼갤 수 있다. 일요일에 국한 됐던 예배를 토요일로 월요일 아침까지로 확장할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각 사역자들의 사역 분담이 더 가중되겠지만 예배를 "치룸"에 더 집중되게 된다. 더 바쁘게 되고, 더 정신이 없을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이 담당하는 예배에 있어서 "Ownership'을 가질 수도 있게 된다. 또한 각 사역자들에게 주어진 책임감의 무게에 서로가 좀 더 '수평적' 관계를 이루게 된다.
성도들은 어떻게 될까? 자신의 예배, 자신이 원하는 사역자들에 맞게 예배를 골라 들어 가려 하겠지만, 그 욕구가 다 충족될 수 없을 것이다. 자기가 원하는 예배에 들어갈 수 있는 절차와 행정 업무가 들어서겠지만, 결국 싫던 좋든 한 곳에 정착해야 될 것이다. 인원 수에 배정되기에 서로 자리를 맞바꿀 수도 유동성 있게 옮겨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다. 설마 뒤에서 암암리에 서로 매칭을 해서 예배 자리, 시간을 바꾸는 진귀한 풍경이 벌어질까 , 그런일은 없으리. 자기 자리에 대한 애착 아닌 애착이 생길 수 밖에 없다. 누가 그 자리에 대신 와서 갈 지 자리를 놓고 일어나는 경쟁이 생길 수 밖에 없다. 열심있고 어차피 교회에 애착이 있던 자들은 자기 자리를 사수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님 새 자리를 어떻게든 얻어가고 앉게 될 것이다.
그럼, 애착이 그다지 강하지 않던 성도들은 어떻게 되는가? 10부 예배를 드린다 해도 채울 수 없던 자리는 어떻게 하는 가? 지역별 성도의 인구분포도를 활용하고, 전략적으로 그들의 신앙의 상태와 출결율 등을 토대로 대형교회의 소속감을 잃지 않게 하면 서 동시에 그들의 니즈를 충족시키기 위한 또다른 예배의 장소가 런칭이 될 수 있다. 어차피 위성교회들을 활용하고 있던 교회들은 더 많은 위성교회들을 세울 구실을 얻게 된다.
그 안에서 예배때모여 담임목사님의 설교를 "온라인 라이브 영상"으로 시청하는 일이 더 많아질 것이다. 집에서 온라인 시청을 해서 예배드리나, 성전에 나와서 온라인으로 시청해서 예배드리나 뭐가 다르냐 하겠지만, 벌써 느낌이 다르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렇담 교회에 다 와서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나, 집에서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나,, 같지 않다면, 과연 그 차이가 뭐냐 이것이다. 만약 여기에 '교제'를 제하여 보자. 지금 코로나 시대에 교제는 더 이상 흔히 즐길 수 있었던 럭셔리가 아니다. 예배만 놓고 볼때, 집에서 드리는 온라인예배나 위성교회에서 드리는 온라인 예배 뭐가 틀릴까?
"하나님의 전에 와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니 틀리지요?" 라고 선뜻 대답할 수 있겠지만, 우리는 지금 교회가 무엇인지 재정의를 하고자 시도하는 단계이다. 예배가 무엇인지 정의가 되야, 하나님의 전이 무엇인지 정의가 된다. 반대로 그 장소를 하나님의 전이라고 설정하고 나서, 그곳에서 드리니까, 그것이 예배지요 라고 주장하는 것은 순환 논리이다..
첫번째 드는 생각은 "기분"이다. 특정한 장소에 와서 나같이 비슷한 옷을 입고, 비슷한 자세를 취하고, 비슷한 의식을 치루는 데서 내가 공유할 수 있는 "기분" 이다. 예배를 드리는 것 같은 '기분'. 이것이 우리에게 있어 매우 중요해 왔다. 우리는 예배에서 '기분'을 매우 중요시 여긴다. 때로는 이 기분을 우리는 '은혜'라고 말한다. 때로는 이 기분을 우리는 '거룩함'이라고 말한다. 예배당에 가면 어떤 '기분'이 든다. 이 기분을 잃고 예배드리는 것은 내 예배의 '흥'을 앗아가는 것이다. 그렇담 이 '흥'을 깨보자. 이 '흥'을 배제 시켜버리고 예배를 진행시켜 보자. 거기서 참다운 예배가 진행 될 수 있는 지 없는지.
화려하고 으리한 대형교회의 성전, 모든 최신 음향기기들이 설비되어 있고, 스팟라이트들이 조명 엔지니어들에 의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며 웅장한 성가대의 목소리가 에코 되어 들리는 그런 세팅에서, 꿉꿉하고 냄새나는 지하 1층 상가 교회로 가보자, 예배 당에 들어가는 순간 "기분"이 다르고 그렇기에, 예배를 드리는 나의 "흥' 이 달라진다. 사람의 오감을 통해 들어오는 인지 정보들이 기분과 흥을 좌우한다. 좋은 환경에서 덜 좋은 환경으로 옮겨간 '예배자'들은 예배의 흥을 찾지 못하고 그 예배는 제대로 드리지 못했다고 고백할 것이다. 거기서 더 흥을 앗아가 보자 이제는 공권력, 경찰들에게 둘러싸여, 감시 당하며 예배를 해야하는 지하 1층 상가 교회이다. 거기에는 흥이 없을 뿐더러 이제는 감시와 탄압이 더해졌다. 거기서 제대로 예배가 드려질까? 그런데 놀랍게도 이런 고백이 심심찮게 들릴 것이다. "그럼에도, 예배에서 난 큰 감동을 경험했어, 우리의 핍박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예배를 들어주심을 확신했어!"
상황은 분명히 더 나빠졌는데, 예배가 더 예배다워졌다고 고백하는 간증이 나오기 시작한다. 이게 무슨 일인가? 이런 간증이 사실 현재에도 일어나고 있고 그다지 희귀한 현상이 아니다. 흥과 기분이 예배의 요소에서 빼았겼음에도 왜 예배가 더 '은혜'스러웠다고 고백하는 것일까? 어디서 트레이드 오프 (trade off) 일어난 것인가?
예배하는 자는 신령과 진정 곧 "in Spirit and Truth" 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하였다. 내 기분과 흥이 spirit이 아니였던가? 이것이 대문자 Spirit이였던가? 원어에는 어떤 차이도 표기되지 않고 있다. 우리의 판단에 달려 있다
두번째 드는 생각은 ----------- <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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